삶터가업 열전

부모는 쌀 재배 딸은 제빵바람난농부 가족

우리나라 최대 곡창지대 김제평야.
이곳에 부모님과 함께 벼와 밀 농사를 짓고 있는
청년 농부가 있다. 가업을 이은 지 어느덧 15년이 된 유지혜 씨다.
그녀는 수제 빵 브랜드 ‘바람난농부’를 만들어
판로 개척과 함께 우리 농산물의 가치를 전하고 있다.
글 임산하 사진 김규남
바람난농부
주소 전북 김제시 진봉면 남고5길 52-4
문의 010-3000-6846
부모의 농업 철학을 이어받은 외동딸
하늘과 맞닿은 김제평야 위로 가을볕이 내려앉았다. 건강하게 자라는 벼를 바라보며 올해 농사도 풍년을 기대해볼 만하다는 유지혜 씨. 이제는 어엿한 농부가 됐지만 본래 농부를 꿈꾼 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농부인 부모님을 보며 자라왔어요. 부모님 곁에서 일손을 돕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죠. 그렇지만 농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었는데, 대학 진학을 앞두었을 때 부모님이 같이 농사를 짓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셨지요.”
결코 가벼운 제안이 아니었다. 부모님은 누군가는 사명감을 갖고 농업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국민의 식량을 책임지고,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일이기 때문에. 본래 농업에 자부심이 있던 부모님이었다.
“늘 성실히 일하신 부모님을 존경해왔지만 제가 농부의 길을 걷는 것은 다른 문제였죠. 미래를 거는 일이기에 쉽게 결정할 수 없었어요.”
고민이 깊었던 지혜 씨는 잠시 선택을 미룬 채 대학에 진학했다. 아무것도 경험해보지 않으면 훗날 미련이 남을 것 같다는 생각에 유학도 가고, 직장 생활도 했다. 그런 지혜 씨가 다시 고향에 돌아온 것은 주도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한 회사의 ‘구성원’으로 남는 것보다 제 삶을 스스로 일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모님의 철학을 이어가고 싶다는 마음도 강했고요.”
농부가 되기로 마음을 굳힌 지혜 씨는 바로 농사일을 배웠다. 이앙기부터 콤바인까지 농기계 교육도 받았다. 어깨너머로 주워들었는데도 모두 처음인 것처럼 낯설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열심히 농사에 매진했다.
“흔히 후계농들은 기반이 갖춰져 있어 편하겠다는 이야기를 듣곤 해요.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 테지만, 그 기반을 지키는 데는 큰 책임감이 필요하죠. 경력으로는 부모님 발밑도 따라갈 수 없는데, 부지런히 배우는 모습에 부모님도 저를 신뢰했어요. 그렇게 저 스스로를 ‘농부’라고 소개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바람난농부가 선보이는 수제 건강 빵
판로 개척의 기회가 된 수제 건강 빵
농부가 된 지 4년쯤 지났을 무렵, 지혜 씨에게는 새로운 판로를 열어야 한다는 고민이 생겼다.
“온 가족이 함께하고 있기 때문에 소득 증대가 필요했어요. 동시에 농업의 가치를 알리고 싶었죠. 농촌 체험으로 제빵 교실을 구상하면서 제빵 수업도 받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연습 삼아 만든 단팥빵 사진을 SNS에 올렸는데, 한두 분이 주문을 하고 싶다는 연락을 주셨어요. 점점 입소문이 나더니 3주 만에 주문이 600개나 들어왔죠.”
판로 개척의 기회를 엿본 지혜 씨는 100% 우리 쌀, 우리 밀로 만든 수제 건강 빵 브랜드 ‘바람난농부’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름을 걸고 하는 일이기에 단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았던 지혜 씨는 레시피부터 새롭게 정립했다.
논에서 피를 뽑고 있는 부녀의 모습
오늘도 건강한 빵을 만들고 있는 지혜 씨
지혜 씨가 운영하는 우리 쌀, 우리 밀 가공 및 상품화 체험장
풍년이 든 바람난농부의 논
“제빵 수업을 받을 때는 수입 밀을 이용하는데 우리 쌀, 우리 밀로 만들면 레시피가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아요. 쌀가루와 밀가루가 상온에 있었는지, 냉장 보관돼 있었는지에 따라서도 다르고, 그날의 온도와 습도에도 영향을 받죠. 빵 만드는 걸 쉽게 생각했다고 반성하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결국 저만의 레시피를 만들어냈어요.”
단순히 빵만을 판매하는 게 아닌, 우리 농산물의 가치를 함께 전하는 지혜 씨. 그래서 그녀는 원재료가 되는 쌀과 밀 재배에도 열정을 쏟는다.
“김제는 이모작 지대여서 자가 채종을 하면 혼입될 가능성이 높아져요. 그래서 고품질 보급종을 활용해 농사를 짓죠. 농약을 사용한 병충해 방제 횟수도 줄이고, 천연 유기질비료를 사용합니다. 또 저온 건조로 영양분이 잘 보존되도록 신경 써요.”
수제 빵의 바탕이 되는 건강한 원재료
농업의 가치를 전하는 체험 교실
제빵 노하우를 살려 체험 교실 문을 연 지혜 씨. 이곳은 1년에 1,000명 정도가 찾아올 정도로 인기다. 덕분에 지역 초등학교로 출강을 가는 경우도 많이 생겼는데, 이때 지혜 씨가 꼭 하는 질문이 있다.
“아이들에게 꿈이 무언지를 물어봐요. 그러면 우리가 아는 직업들이 마구 튀어나오죠. 그런데 단 한 번도 ‘농부’라고 대답하는 아이를 만난 적이 없어요. 왜 그런지 되물으면 ‘농부는 힘들잖아요’라는 단순한 대답이 돌아와요. 농업의 가치를 그 누구도 아이들에게 알려준 적이 없기 때문이에요. 아이들이 아침에 먹고 온 모든 것이 농부의 손에서 길러진 것인데 말이죠. 미디어에서도 농부는 힘들어하는 모습으로만 등장하죠. 고정관념을 깨고 농산물의 소중함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농업의 가치를 알리는 지혜 씨가 국립농업과학원장, 농림축산식품부장관 등으로부터 받은 표창장
그래서 ‘바람난농부’다. 한자리에 머물지 않고 ‘바람난 것’처럼 움직이며 가공, 체험, 강의를 진행하는 동안 농업의 가치를 알리고 있기에. 부모님의 철학이 지혜 씨를 통해 더 많은 이에게 전해지는 중이다. 이런 지혜 씨에게는 엄격한 철칙이 하나 있다. 농번기에는 절대 외부 활동을 하지 않는 것. 그녀가 하는 모든 일의 뿌리가 ‘농사’이기 때문이다. “제가 농사를 지어야 더 맛있는 빵을 만들 수 있고, 더 알찬 강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최근에는 6차 산업 선진지 견학으로도 많은 농업인이 저희 농장을 찾고 있어요. 그래서 더욱 모범적인 농부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다양한 판로 개척으로 농업의 가치를 알리는 지혜 씨. 그녀의 걸음걸음이 농촌의 미래를 밝히고 있다.
바람난농부에서 진행하는 제빵 체험 현장
유지혜 씨의 가업 잇기 tip
1. 우수한 품질의 곡식 생산
부모님으로부터 농지는 물론 농부의 사명감까지 물려받은 후계농으로서, 지혜 씨는 책임감 있는 자세로 그 기반을 지켜가고 있다. 다양한 판로를 개척하면서도 농번기에는 농사에만 힘쓰며, 고품질의 쌀과 밀을 생산하기 위해 저온 건조 등 여러 방식을 도입했다.
2. 가공식품으로 농외 소득 올리기
직접 수확한 쌀과 밀로 수제 빵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는 지혜 씨. 레시피를 정립하기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했으며, ‘건강한 수제 빵’이라는 강점을 내세워 새로운 판로를 개척했다.
3. 노하우를 갖춘 체험 교실
지혜 씨는 제빵 노하우를 살려 농촌 체험 교실을 운영하면서 많은 이에게 우리 농산물의 중요성을 알리고 있다. 이는 농촌 소멸을 막는 데도 일조하며, 선진지로서 예비 농업인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