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걸무’의 가능성을 엿보다
흰 눈이 펑펑 내리던 겨울날, 경기도 여주시의 한 마을을 찾았다. 수확을 마친 밭마다 눈이 소복이 쌓여 있는데, 웬걸 한쪽에서는 트랙터가 분주히 땅을 뒤집는다. 당연히 빈 밭인 줄 알았는데 어린아이 주먹만 한 작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트랙터를 끌던 청년 농부 이재호 씨가 이 낯선 작물을 소개한다.
“이곳 여주시 가남읍과 이천의 일부 지역에만 나던 토종 작물 ‘게걸무’예요. 크기가 작으면서 껍질이 두껍고 매운맛이 특징이죠. 예전에는 게걸무 밭이 따로 있지 않았고 자투리땅에 심어서 김치나 장아찌로 담가 먹었다고 해요. 이 지역 분들은 ‘게거리’라 불렀고요. 상품성은 없어도 그 맛을 잊지 못하는 분들이 조금씩 심으며 가치를 이어왔죠.”
게걸무가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은 건 10년 전쯤. 게걸무 씨앗 기름이 폐 건강에 좋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다. 2014년 세계적 식문화 유산 보호 프로젝트인 ‘맛의 방주(Ark of Taste)’에도 등재됐다.

기관지와 폐 건강에 좋은 게걸무씨앗기름 제품
“게걸무를 찾는 분이 많아 동네 길이 마비될 정도였어요. 학생 때부터 고구마 등 부모님이 재배하는 작물의 온라인 판매를 돕곤 했는데, 찾는 사람이 많으니 부모님이 저에게 게걸무 판매를 도와달라 하시더라고요. 인터넷 카페에 판매 글을 올리니 게걸무와 씨앗 주문이 꽤 들어왔죠. 그러다 게걸무 씨앗 대신 기름을 사고 싶다는 문의가 많아졌어요. 그때 기름 가공을 본격적으로 해봐야겠다 생각했지요.”
IT 회사에 다니던 그는 인증 업무를 하며 쌓은 관련 분야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게걸무 가공 관련법부터 공부했다. 평소에도 언젠가 고향에서 부모님과 함께해야지 생각하던 터라, 2016년 여름 퇴사와 함께 본격적인 가업 잇기에 나섰다.
“우선 관련 법을 바탕으로 설비를 갖춰 가공을 시작했어요. 부모님은 잘 다니던 회사를 왜 그만두냐고 하셨지만, 제가 씨앗 기름을 가공하면 부모님이 농사지은 게걸무의 부가가치를 크게 높일 수 있다는 걸 말씀드리며 설득했죠. 그렇게 ‘여주게걸무씨앗농장’의 문을 열었어요.”

첫맛은 달고 씹을수록 매운맛이 나는 게걸무

수확한 게걸무의 줄기와 잎을 말린 시래기
두 번씩 심고 거두며 생산하고 자체 기술로 가공
게걸무 씨앗 기름을 만드는 것은 품이 많이 드는 일이다. 8월 말에 게걸무 씨앗을 심고 11월 말쯤 무를 수확해 겨울 동안 저장고에 보관한다. 이듬해 3월 중순 무렵 저장해 둔 게걸무를 다시 땅에 심는다. 여기서 새순이 올라와 4월 말쯤 꽃이 피고 씨앗이 맺히면 6월 말에 씨앗을 수확한다. 무는 탁구공 크기 정도까지 키워서 이듬해에 심기 좋게 하고, 씨앗은 장마철을 피해서 수확해 품질을 유지한다. 품질 좋은 씨앗을 얻기 위해 두 번씩 심고 거두는 것이다.
씨앗 기름 가공에는 자체 착유 기술을 적용한다. 재호 씨는 게걸무 씨앗 기름에 적합한 전용 착유기도 개발해서 쓰고 있다. 게걸무 씨앗이 지닌 건강 기능성을 최대한 끌어 올리는 동시에 활용도와 맛까지 높이기 위해서다. 게다가 관련 분야에 대한 연구에도 시간을 쏟았다.

저온 압착 방식으로 착유

초여름에 수확해 기름 원료로 쓰는 게걸무 씨앗
“국내외 관련 자료를 공부하며 기름을 짤 때의 적정 온도를 찾았고, 착유기 전문가와 기름 짜는 일을 오래 한 분들을 찾아다니며 노하우를 배웠어요. 이를 응용해 고온에서 볶지 않고도 수율을 높이는 방법을 찾았죠. 또 소비자가 기호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볶지 않고 만드는 ‘냉압착 기름’과 안전한 온도에서 볶아 만드는 ‘저온 압착 기름’을 모두 생산하고 있습니다.”
기술력에 노력까지 더해진 진심이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전해지면서 재호 씨의 제품을 찾는 이도 자연스럽게 늘었다. 폐와 기관지 건강에 이로운 게걸무의 효능을 직접 경험한 소비자들의 입소문으로 수요도 충분한 편. 덕분에 부모님의 농사에도 변화가 생겼다. 게걸무가 농사의 주 작물이 됐고, 재배 면적이 3만3,000㎡(1만 평)로 늘었다. 여기서 연간 3t 내외의 게걸무 씨앗을 수확한다.

압착 전 게걸무 씨앗을 볶아내는 이재호 씨
여주 게걸무 보존·가공하는 대표 농장 될 것
재호 씨 농장의 주력 제품은 100% 게걸무 씨앗으로 만든 ‘게걸무씨앗기름’이다. 180ml, 270ml, 375ml 등 세 가지 제품이 있으며, 180ml 기름 한 병을 만드는 데 1kg 정도의 씨앗이 쓰인다. 씨앗 기름은 375ml 제품 가격이 10만 원을 훌쩍 넘는 고가임에도 고정 고객이 상당하다.
12월에는 수확한 게걸무 중에서 큰 것을 골라서 무말랭이를 만든다. 선주문한 고객에게 그대로 판매하거나 덖음차로 만들어 상품화한다. 비타민 C가 풍부한 게걸무 시래기를 찾는 이도 꾸준하다. 재호 씨는 게걸무 가공 제품을 찾는 소비자들이 믿고 구입할 수 있도록 매달 정기적으로 품질 위탁 검사도 진행하고 있다.
제품 판매처는 소비자가 편리하게 구입할 수 있도록 자체 쇼핑몰에서 인터넷 오픈 마켓까지 다양하다. 제품을 직접 보고 싶은 이들을 위해 여주 로컬 푸드 직매장 등 오프라인 매장에서도 판매 중. 미국·캐나다·중국 등 해외에도 제품을 찾는 교민들이 있어 해외 배송 서비스도 제공한다.
농장과 제품 홍보에도 열심이다. 여러 SNS를 운영하며 게걸무 농사부터 씨앗으로 기름을 만드는 과정 등 관련 내용을 소개해 고객과의 신뢰도 쌓고 있다. 지난해엔 농림축산식품부로부터 농촌 융복합 산업(6차산업) 인증을 받아 농업 생산과 가공, 유통에서 그 역량을 인정받았다.
부모님의 농장을 이어받아 마을의 맛을 알리고 있는 재호 씨. 그의 새해 목표는 무엇일까.
“언제 어디서나 간편하게 휴대하고 섭취할 수 있도록 게걸무씨앗기름의 스틱형 제품을 만들 계획이에요. 게걸무씨앗 기름의 우수성을 널리 알려서 게걸무가 쌀·고구마와 더불어 여주 특산품의 하나로 확실히 자리 잡길 바랍니다. 그 길에 저희 가족, 여주게걸무씨앗농장이 앞장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