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이 되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어떤 모습으로 늙느냐는 스스로의 몫일 터. “60세가 되어도 인생은 몰라요. 나도 처음 살아보는 거니까.” 배우 윤여정의 어록처럼 우리는 60세가 되어도 70세가 되어도 여전히 인생은 모른다. 우리 모두 처음이니까.
살다 보면 인생을 ‘새로 고침’ 하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어느 나이대인들 그런 순간이 없을까 싶지만, 70대라고 뭐가 다를까? 뭐가 다를 것도 같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가 <비밥바룰라>다. 영환(박인환)은 암 진단을 받고 인생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평생지기인 순호(신구)와 현식(임현식)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살면서 이루지 못했던 것을 이뤄보자는 것. 자식을 위해 평생을 살아온 영환, 치매에 걸린 아내 미선(최선자)의 곁을 지키는 순호, 모태솔로 현식은 “그래, 해보자”는 마음으로 각자 버킷리스트에 도전한다. 추억의 시간을 함께 한 친구를 찾고 나서 평균 연령 70세인 평생지기들은 각자 이루고 싶었던 ‘꿈’ 찾기를 시작한다. 인생의 말미에 생전 이루지 못했던 버킷리스트를 채워나가는 내용의 영화들은 이전에도 있고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비밥바룰라>만의 미덕은 관객 저마다의 추억으로 기억해온 노년기 배우들을 대거 스크린으로 소환했다는 것. 박인환, 신구, 임현식처럼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하는 배우들 외에도 윤덕용, 정영숙, 최선자 등 그간 뜸했던 배우들의 간만의 출연이 반갑다. 살뜰한 아들 내외의 봉양을 마다하고 70대 친구들이 의기투합해 함께 살기로 한다는 설정은 노년기의 판타지를 보여주는 한 장면이기도 하다.
작품 속 다양한 엄마의 모습이 존재하지만 그중 가장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배우 중 하나가 단연 나문희가 아닐까한다. 지난 2007년 종영한 <거침없이 하이킥>에서의 그녀의 출연분은 일종의 밈으로 MZ세대의 SNS 피드에도 자주 등장한다. 하이킥 이후 그녀는 꾸준하고 올곧은 연기자로서 여러 작품을 선보이며 행보를 쉬지 않고 있다. 그 성과 중 하나가 영화 <오! 문희>다. 노년 배우가 맡을 수 있는 배역에는 현실적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이를테면 고질적인 가난에 처하고 몸에는 질병이 찾아오게 마련인 것처럼. <오! 문희>는 이러한 현실적 한계에 부딪치는 사회적 약자로서의 한계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당면한 서사를 힘 있게 끌고 나간다. 평화로운 농촌인 금산 마을에 살고 있는 두원(이희준)은 하나뿐인 딸 ‘보미’가 뺑소니 사고를 당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현장의 유일한 목격자는 기억이 깜빡깜빡하는 ‘엄니’ 문희(나문희)와 개 ‘앵자’뿐. 경찰의 수사에 진전이 없는 상태에서 예기치 못한 순간 문희가 뜻밖의 단서를 기억해낸다. 두원은 엄니와 함께 논두렁을 가르며 직접 뺑소니범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다. 치매에 걸려 자식의 앞날에 방해가 된다며 목을 매겠다는 소동을 벌여도 한사코 유쾌함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건 이 영화의 타이틀이기도 한 배우 나문희의 저력이 아닐까 싶다.
낯선 미국, 아칸소로 떠나온 한국 가족. 가족들에게 뭔가 해내는 걸 보여주고 싶은 아빠 제이콥(스티븐 연)은 자신만의 농장을 가꾸기 시작하고 엄마 모니카(한예리)도 일자리를 찾는다. 아직은 어린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모니카의 엄마 순자(윤여정)가 함께 살기로 한다. 한국에서 가방 가득 고춧가루, 멸치, 한약 그리고 미나리 씨앗을 담은 할머니가 도착한다. 의젓한 큰딸 앤(노엘 케이트 조)과 장난꾸러기 막내아들 데이빗(앨런 킴)은 여느 그랜마 같지 않은 할머니가 영 못마땅하다. 하지만 어느덧 두 손을 맞잡고 가족으로서 서로 의지하기 시작한다.
어디서든 잘 자라는 미나리와 같이 낯선 땅에서의 하루하루를 새롭게 받아들이며 희망을 잃지 않는 가족의 이야기가 세계인의 가슴을 울렸다. 이 사랑스러운 가족의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 순자에 대한 애정은 더욱 각별했다. 윤여정은 영화 <미나리>로 제93회 오스카 여주조연상을 거머쥐었다. 그간의 행보에서 곧잘 보였던 파격적 캐릭터는 아니지만 단단한 내공을 머금은 1980년대 한국 할머니의 모습은 오히려 보편성을 획득하는 개가를 올렸다.
글 임수민(대중문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