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숨을 멈춘다고 한다. 바닷속 치열한 투쟁 끝에 다시 삶으로 나오기 위해 내뱉는 한 모금의 숨 ‘호오이, 호오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딛고 생계를 이어갈 수확물을 걷어 올리고 내뱉는 해녀들의 숨비소리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제주의 삶과 경치를 오롯이 담아낸 장터가 발길을 붙든다.
제주 동쪽, 구좌읍 세화(細花)리는 가는(작은) 곶이 많다고 해 붙여진 작은 어촌이다. 곶과 곶 사이에는 바다에서 굳은 검은 화산석과 푸른 바다 빛깔로 인상적인 대조를 이룬다. 평소에는 한적하고 조용한 이곳이 닷새마다 해안도로가 차로 들어찰 만큼 북적거린다. 끝자리 5, 0일에 열리는 세화해녀민속오일시장(이하 세화오일장) 때문이다. 세화오일장은 주민을 위한 장터지만, 해안도로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상 날이 갈수록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잦아지고 있다. 구수한 시골장의 정취를 통해 제주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느끼고, 과일이나 다양한 먹거리를 싼값에 즐길 수 있어 일석이조의 기쁨을 맛보기 때문이다.
“삼춘 이 갈치 엄마마씀?”
“이거 막 물좋아. 싸게 주쿠매 가져갑써.”
“무사경 비싸우꽈? 호썰 더 싸게 안되카마씀?”
어디선가 흥정하는 소리가 들리면 이곳이 제주임을 새삼 깨닫는다. 제주 사투리가 워낙 뭍의 말과 달라 오가는 대화를 정확히 알아듣기는 힘들지만 그래서 더욱 신기하고 재미있는 풍경이다. 규모는 작아도 있을 건 다 있는 세화오일장은 싱싱한 채소와 생선, 건어물, 과일, 신발과 의류, 각종 생활용품 등 없는 것이 없는 시골 장터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답게 이곳의 어물전에는 자리돔, 옥돔, 우럭, 조기, 갈치 등 해산물이 풍부하다. 제철을 맞은 황금향과 레드키위도 향긋한 냄새를 풍기며 여행자를 유혹한다. 시장에서 직접 고른 물건을 택배로 부쳐주기에 관광객도 안심하고 구입할 수 있는 것이 이곳의 매력이다.
검은 현무암과 푸른 바다가 조화로운 제주올레길 20코스에 위치한 세화오일장은 1912년 옆 마을 하도리 별방진에서 열린 것을 시초로 1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무엇보다 1930년대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이자 여성이 최초로 주도한 항일운동인 ‘제주해녀항일운동’의 시작점이 세화오일장이다.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김계석, 고순효 등 5명의 해녀 대표가 이끈 제주해녀항일운동은 1931년 6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이어졌다. 일제의 탄압과 착취에 10여 년을 시달린 수백 명의 해녀들은 1932년 1월 7일 ‘너희들이 총칼로 대응하면, 우리들은 죽음으로 대항한다’라고 외치며 세화오일장을 중심으로 투쟁의 불꽃을 피워 올렸다. 다음 장날인 12일에는 하도리, 세화리, 오조리, 시흥리 해녀 1,000여 명이 세화오일장에 모여 수많은 군중과 집회를 열었다. 이 과정에서 해녀들은 빗창(호미와 전복을 따는 쇠꼬챙이)을 들고 일제와 맞섰다. 이를 시작으로 제주 전역에서 1만 7,000여 명이 항일운동에 참여했으며 총 230회의 시위와 집회로 발전한 대규모 항일운동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러한 역사성과 제주 해녀들의 강인한 정신력을 기리며 2016년 세화오일장은 ‘세화해녀민속오일시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날이 좋으면 ‘호오이’ 소리를 내며 수면 위로 얼굴을 내민 해녀를 발견하는 세화오일장은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자 해녀들의 터전으로 매년 가을이면 세화항 일대에서 제주해녀축제가 열린다.
오일장에 왔으니 장터 음식을 맛보는 건 당연지사. 장터 가장자리 옥빛 세화 바다가 내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맛나분식은 즉석에서 튀겨내는 튀김과 국수가 맛있는 집이다. 특히 오동통한 오징어튀김이 인기다. 주문하면 바로 끓여 내오는 장터식 칼국수와 멸치국수는 가벼운 한 끼로 해결하기 좋다. 여기에 막걸리 한잔에 아름다운 바다 풍경까지 곁들여지니 이보다 더한 진수성찬이 또 있을까. 세화오일장의 또 다른 맛집 자매식당 역시 늘 만석인 곳으로 대표 메뉴는 순대국밥이지만, 비빔밥도 추천한다. 상추, 콩나물, 무채 외 별게 들어 있지 않지만 밥 한 그릇이 뚝딱 비워질 정도로 감칠맛이 난다. 또 시장을 돌다 보면 제주 빙떡을 파는 곳이 있으니 꼭 맛보길 바란다. 빙떡은 메밀을 동그랗게 빚어 얇게 펴 부친 후 무나물을 올리고 둘둘 말아 먹는 것으로 제주 제사상에 반드시 올라가는 전통 음식이다.
오후 2시가 지나면 북적이던 장터의 마법 같은 시간이 지나고 해안도로는 다시 예전의 한가로운 모습으로 돌아간다. 새파란 하늘 아래 맑은 옥빛으로 물든 바다가 고운 모래사장을 드러내는 세화해변에 자리한 세화오일장은 점심시간이 지나면 신기루처럼 사라지지만 그 안에는 물건을 사고파는 것을 넘어 제주의 삶과 문화, 역사가 온전히 남아 있다. 해녀들이 지켜 낸 바당밭의 숨결이다.
Ⓒ제주해녀박물관
제주해녀박물관
기원전부터 역사를 가진 제주의 해녀 문화를 중심으로 해양, 어촌, 민속, 어업 등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안팎의 전시물은 모두 해녀들이 기부한 것이다. 전시관 안에는 실제 해녀의 집도 기부받아 옮겨와 있으며 음식 문화와 양육, 반어반농, 영등굿 문화 등이 자세히 전시돼 있다. 약 7분 여의 영상은 꼭 추천하니 관람하길 바란다.
Ⓒ정수희
비자림
천년의 세월이 녹아든 신비로움이 가득한 비자림은 500~800년생 비자나무가 자생하는 곳으로 세계적으로 희귀한 장소다. 벼락 맞은 나무부터 긴 세월이 느껴지는 아름드리나무, 새천년 비자나무와 연리목까지 다양한 비자나무를 만날 수 있다. 피톤치드를 머금은 상쾌한 산책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레 산림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
글 이봄 사진 봉재석 영상 전한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