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는 굵은 선으로 빛이 물체에 닿는 순간은 얇은 선으로. 사유하는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자유로움. 선으로 만드는 다채로운 미학, 드로잉이다.
수 세기 동안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만의 스타일로 드로잉을 그려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과학적 스케치, 파블로 피카소의 추상적 드로잉, 프린트 기법으로 색다른 드로잉을 선보인 앤디 워홀, 일상을 스냅샷으로 표현한 데이비드 호크니까지.
작가의 예술세계를 통틀어 보기 위해선 드로잉을 놓쳐선 안 된다고 한다. 드로잉은 무한한 가능성과 맺음이 없는 완성작이라 불리며 작가의 예술관을 관통하는 지점을 보여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드로잉은 선에 의해 이미지를 그려내는 기술이자 예술가의 정서적 부분까지 묘사하는 것으로 의미한다. 다양한 그림 도구를 이용해 종이와 같은 매체 위에 이미지를 표현하는 시각예술의 형태다. 주로 연필, 목탄 등을 이용해 선으로 이미지를 그려내는 기술로 색채보다는 선을 통해 대상의 형태를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둔다. 불어로는 데생(dessin), 한국어는 소묘(素描)라 부르는 드로잉. 즉 드로잉, 데생, 소묘는 모두 같은 의미인 것이다.
“그것을 성취하는 것은 어렵지만 흥미로운 일이기도 합니다. 보고 있는 모든 것을 단 몇 개의 선, 즉 그 사이에 부피감을 드러낼 몇 개의 선으로 어떻게 함축적으로 줄일지 찾아내는 일 말입니다.”
데이비드 호크니
“드로잉은 예술의 ‘정직함’이다. 속임수를 쓸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좋거나 나쁘거나 둘 중 하나다.”
살바도르 달리
드로잉은 ‘선’과 ‘명암’의 영역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채색화와는 구별된다. 전통적인 드로잉이 단색이라면 현대의 드로잉은 채색화에 가까우며, 경계를 넘기도 한다.
드로잉은 그릴 수 있는 표면만 있다면 어디든 가능하다. 종이뿐 아니라 목재, 플라스틱, 가죽, 천 등 표면에 따라 드로잉의 표현도 달라진다. 어찌 보면 아이들이 벽에 하는 낙서도 드로잉으로, 고대 풍요를 기원하며 표현한 동굴 벽화는 드로잉의 시초로도 볼 수 있겠다. 즉 드로잉은 예부터 문자보다 먼저 사용된 체계이자 의사소통의 형태로도 사용된 셈이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까지 목판에 그림을 제작했던 예술가들은 종이가 보급되면서 아이디어나 습작을 스케치할 수 있게 됐다. 19세기 사진기의 발명으로 사실적으로 묘사된 그림의 의미는 줄어들었지만, 20세기 이후 작가의 개성과 독창성을 장려하는 분위기로 변모했다.
주로 작품의 계획이나 착상을 스케치하기 위해, 혹은 기술을 훈련하기 위한 과정이라 명시했던 드로잉. 완성된 작품으로 인식되지 않았던 드로잉이 오늘날 작가의 생각이나 이상을 순수하고 자유롭게,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원초적인 표현 방법이라는 시각으로 확산되고 있다. 현대의 드로잉에서 상상력이 가미된 독창적인 작품들이 많이 제작될 수 있던 것도, 하나의 독립된 회화 예술로 새롭게 탐구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라인 드로잉(Line Drawing)은 현재 드로잉 기법 중 가장 기본이 되는 것으로 명확한 선과 형태를 표현하기 위해 음영 등을 넣지 않고 펜으로만 그리는 것을 말한다. 크로키(Croquis)는 스케치와 같은 뜻으로 디자인의 최초의 구상을 생각나는 대로 그린 것을 뜻한다. 그리는 이가 상상한 이미지를 생각한 그대로 표현하기에 가장 직접적이라 말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빠른 시간 내에 선으로 완성하며 1분, 3분, 5분 10분 등으로 시간을 정하고 동적인 물체를 관찰해 그려내기도 한다.
크로키는 작품의 형태로 표현할 수 있지만 대부분 작품을 완성하기 전인 연습에 속한다. 대상의 형태를 시간 안에 파악할 수 있어 연습 과정으로 의미하기 때문이다.
형태 파악에 중점을 두는 게 크로키라면 그림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선에 대한 이해를 돕는 컨투어 드로잉(Contour Drawing)도 있다. 컨투어 드로잉은 사물의 윤곽을 뜻하는 프랑스어 컨투어와 그림의 합성어로 사물의 윤곽을 그리는 드로잉을 뜻한다. 사물의 형태를 라인으로 표현하는 것인데, 이는 라인 드로잉과 의미가 같다
현재의 컨투어 드로잉은 일반적인 라인 드로잉이 아닌 그림의 시작부터 끝까지 종이에서 펜을 떼어내지 않은 상태로 그림을 그리는 드로잉 기법으로 소개되고 있다. 즉, 선 하나로만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원 라인 드로잉’이라고 불린다.
“드로잉은 예술가의 가장 직접적이고 순간적인 표현이다. 채색된 회화 작품보다도 화가의 진실한 성품을 드러낸다.”
에드가 드가
드로잉은 호흡이 중요하다. 한 호흡으로 한 번의 선이 그어지는 것인데, 같은 선이어도 진하기의 조절과 굴기 조절에 따라 다양한 느낌을 낼 수 있다. 콩테(Crayon Conté)의 넓은 면을 사용해 덩어리적인 느낌으로 굵은 느낌을 낼 수도 있다.
이처럼 드로잉은 대상과 똑같은 모습을 그리는 것이 아닌 그리는 사람이 사유하고 말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같은 모습을 보고도 나만의 조형미를 찾아내는 것, 그래서 드로잉의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 콩테(Crayon Conté) 프랑스의 과학자이자 화가인 니콜라 자크 콩테(Nicola-Jacques Conté)에 의해 만들어진 소묘용 도구로 흑, 백, 세피아,적갈색 네 가지 색이 있다. 경도는 연필에서 목탄 사이까지 여러 종이 있다.
푸릇한 잔디와 붉게 물든 나무 사이로 선선한 빛이 들어선다. 서울 송파구의 올림픽공원 한 편에 자리한 소마미술관은 사계절의 변화를 그대로 맞이하며 자연과 소통하는 도심 속의 에술 쉼터로, 서울 시민은 물론 여러 관광객에게 사랑받는 공간이다. 이곳에는 드로잉의 가치와 신념을 지키기 위해 만든 ‘소마미술관 드로잉 센터’가 자리한다.
소마미술관 드로잉 센터(SOMA Drawing Center)는 우리나라 최초의 드로잉 센터로 모든 예술 창작의 기본인 드로잉의 중요성을 새롭게 부각시키고 드로잉 영역을 확장, 발전시키고자 건립되었다. 과거 드로잉의 역사를 조망하고 동시대 드로잉을 살필 수 있는 공간이다.
2006년 11월 개관함과 동시에 ‘드로잉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지니며 연구하면서 드로잉을 미술에 국한하지 않고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소마미술관 드로잉 센터는 결과보다는 과정을, 개념보다 상상을, 완성보다 실험에 초점을 맞춘 창조 작업을 선호하며 드로잉을 모든 장르를 포함함과 동시에 장르의 구분 없는 탈장르적 개념이라 칭한다. 미완성의 아이디어뿐 아니라 완성된 작품에 이르기까지 육체적·정신적 창조 활동의 모든 생산물을 기획하고 전시한다.
건립된 지 17년이 되었지만 드로잉의 가치가 대중은 물론 예술계에서도 수면 위로 떠오른 지 얼마되지 않은 관계로 여전히 드로잉에 대한 무수한 물음표를 건네받으며 드로잉에 대한 세계를 확장시키는 중이다.
소마미술관 드로잉센터는 1관에 드로잉 스페이스(SOMA Drawing Center Space), 드로잉 아카이브(SOMA Drawing Center Archive), 소마미술관 홈페이지에 있는 등록작가 아카이브(SOMA Drawing Center Archive) 등 세 개의 공간으로 이뤄져 있다.
전통적 드로잉의 개념에서 현대적 드로잉의 개념을 개별적·포괄적으로 짚어보는 기획전, 작가 공모를 통해 선정된 작가들의 신선하고 독창적인 드로잉을 다루는 공모전이 연중 운영된다.
이외에 드로잉에 관한 도서와 등록작가 포트폴리오를 보관하는 자료실, 기획전과 공모전으로 꾸며지는 전시실, 등록작가 정보 및 활동 소식 공유를 위한 온라인 아카이브가 운영된다. 또한 드로잉 아카이브에는 국내외 미술 관련 서적과 매거진, 화집, 도록 등을 소장·보관하고 있다.
소마미술관은 서울 올림픽 대회의 성과를 예술로 승화한 공간으로 자연과 사람, 예술과 건축이 공존하는 곳이다. 미술관과 조각공원이 연결돼 있어 세계 조각 작품들과 조경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다.
서울 송파구 위례성대로 51
02-425-1077
글 정수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