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특별한 재능을 가진 소수의 인물이 누리는 특권인 것일까?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글씨에 조형미를 담는 배태랑 화가는 “아니”라고 답한다. 누구나 다 한다는 요즘 예술의 가치를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예술은 그저 ‘나의 소리를 세상에 내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 배태랑 화가를 만나러 가는 길은 탐험을 떠나듯 설레었다.
배태랑 화가에게 이 시대의 직업상을 투영한다면 그는 N잡러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 세상에 하나뿐인 글씨를 쓰는 캘리그래피 아티스트 그리고 대안학교에서 인문학을 가르치는 선생님까지. 그는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세상과 소통하며 재화를 벌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냐고 물어보면 생업은 따로 있고 본업은 화가라고 말을 해요. 생업으로는 대안학교 회사 소속으로 주로 중학생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친다고 하죠. 캘리그래피도 사실 글씨는 매일 쓰는 거니까 매일 작업한다고 볼 수 있고요. 물론 상업적으로 팔려야 가치가 있지만요.”
세속적 호칭으로 그는 화가, 작가, 선생님이라고 불리지만 사실 그는 지금 하는 모든 일의 비전공자이다. 대학에서 그가 전공했던 것은 ‘심리학’과 ‘국어국문학’으로 지금 직업과는 꽤 거리가 있는 공부였다. 그런 배태랑 화가가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게 된 데는 2011년 인사동에서 있었던 일이 기폭제가 되었다.
“처음에 캘리그래피 작가로 작품을 쓰기 시작했을 때 그저 사람들이 손글씨로 많이 쓰면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어요. 그래서 사람들과 동아리를 만들어 같이 연습하고 가르치기도 했죠. 그러다가 어느 날, 인사동에 어느 도장 파는 곳에 갔는데 그 공간이 엄청 재밌었어요. 나도 글씨를 쓴다고 했더니 그곳 젊은 사장님이 제게 서예를 전공했냐고 물어보셨어요. 아니라고 했더니 요즘은 ‘개나 소나 글씨를 쓰네’라고 하더라고요.”
배태랑 화가는 그 말에 소위 꼭지가 돌았다. ‘왜 글씨는 아무나 쓰면 안 되는 거지? 이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그럼 난 개나 소나 글씨를 쓰게 만들어야겠다, 전공자도 아니니까 잘 쓸 필요도 없고 사람들과 같이 재미나게 낙서하면 되겠네’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있잖아요. 회화든 낙서든 캘리그래피든 그림이든 내가 하고 싶은 걸 했을 때 사람들이 ‘너는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면 돼요. 의도를 이해해도 좋고, 이해 못 해도 상관은 없어요. 저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런 예술의 일상성에 꽂혀 있는 상태예요.”
예술은 대단한 게 아니다, 라고 말하는 듯 그의 눈빛에 힘이 들어간다. 화가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 과정도 비슷했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그에게 사실 그림과 글씨, 낙서는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었다. 개인이 즐기던 취미가 누군가에게 의뢰받는 일이 되고, 비용을 받는 작업이 되기까지 삶의 굽이에서 뜻하지 않은 기회를 만나면서 기쁨을 느끼게 됐고 어느덧 이 자리에 다다랐을 뿐이다.
군대에서 조교의 명령으로 병사들 팬티에 이름 석자를 써주었더니 “야, 네 글씨는 팔아도 되겠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 학교 앞 단골 카페에서 사장님의 부탁으로 스탬프를 찍는 카드를 만들고 5만 원을 받았던 것, 그러다가 카페 메뉴 디자인도 하고 간판도 썼던 것, 어느 순간 카페에 놓여 있던 자신의 그림을 학교 학생들이 들고 다니는 모습을 봤던 것. 이런 일련의 시간이 그의 전공과 취미의 자리를 바꿔 버렸다.
“그림은 가장 단순한 점과 선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 참 재밌습니다. 큰마음을 먹지 않아도 내킨다면 지금 바로 그림을 그릴 수 있으니까요. 그림은 입체를 평면으로 옮기는 작업이니까 그 과정에서 왜곡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그 점도 사랑스러워요. 투시를 사용해서 최대한 실제처럼 보이게 그릴 수도 있지만 밸런스가 딱 맞지 않는 그림도 그 자체로 아주 귀엽다고 느낍니다. 단순한 방식을 따르지만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범위는 무궁무진하기에 저는 그 부분에 자주 감격해요.”
배태랑 화가는 습관적으로 드로잉을 계속 하고 있지만,아주 잘 그리고 싶다는 욕망은 없다고 말했다. 그저 매일매일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고, 그래서 되도록 매일매일 그림을 그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 보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고 싶다, 는 표현이 자신의 상태에 더 잘 어울린다고 말하는 그는 “그래서 질리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전 그림을 계속 그리고 싶으니까요. 회화, 드로잉, 그림 다 좋지만 ‘낙서’라고 얘기했을 때 진입 장벽이 제일 낮습니다. 낙서는 즉흥적이고, 귀엽고, 내 감정을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고, 어떻게 해야 한다는 정해진 룰이 없어서 좋아요.”
당분간은 이 목표만 생각한다는 그의 다짐 같은 말이 진열대에 놓인 레고를 바라보는 소년의 눈과 닮아있는 듯하다.
배태랑 화가는 세상에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예술가이다. 2012년부터 꾸준히 가져온 전시회는 그가 세상에 대고 외치는 확성기 같은 것이다. ‘완판전시(2013)’, ‘모노드로잉전(2016)’, ‘두 번째 모노드로잉전(2017)’, ‘개인전 낙서입문(2018)’ 등 다양한 전시회와 작업 등을 통해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자신의 이름을 알려 온 그는 세상에 작은 영향력을 미치고자 하는 이유로 늘 바른 생각을 하려고 노력한다. 깊은 우물물에서 작품과 사유를 건져 올리기 위해 들이는 공도 아깝지 않다.
“쉬운 책을 많이 읽으려고 합니다. 그림책이든 동화책이든 역사책이든 독서는 제게 굉장히 중요한 취미예요. 동아리와 책 모임을 통해서도 책을 읽습니다. 그림책을 보면서 느끼는 제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또 당장 그 책을 읽고 뭔가를 하지 않더라도, 5년 전에 읽은 책이 제 어딘가에 남아있을 테니까 계속 입력해놔요. 아이들과 함께하는 수업도 굉장한 영감이 되고 사람들과의 대화도 마찬가지지요. 영감은 일상에서 늘 받는 것 같아요.”
그의 드로잉은 자유롭지만 핵심은 명확하고, 글은 단순하지만 명료하다. 글씨는 그림와 낙서를 하릴없이 넘나드는 모양새다. <쌤, 코끼리 그려주세요>, <댕뇨일기>가 한 장 한 장 소중히 넘어간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대한 고민, 당뇨에 관한 이야기, 화들짝 놀라는 일을 만나도 욕이 아닌 “큰일날 뻔 했네”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배 작가의 소망이 그대로 녹아있는 듯 따스한 책이다.
“앞으로 계획이요? 책은 꾸준히 낼 예정이고 그림 전시회도 가질 거예요. 저는, 그림이 너무 좋고 아이들이 너무 좋으니까요. 그래서 다행이에요. 안정된 환경에서 살 수 있어서요.”
배태랑 화가에게 세상을 놀라게 할 어마어마한 성과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고 글씨와 글을 쓰고, 좋은 사람들과 마음이 통하는 작업을 하면서 예술가로서 자신의 소리를 밖에 들려줄 수 있다는 사실에 방점을 찍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글 이경희 사진 이성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