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을 향한 애정 어린 시선은 새로운 지향점을 만든다. 나라의 근본을 위한 어진 마음은 저수지, 만석거(萬石渠)로 태어났다. 정조대왕의 농업혁명과 개혁정책의 산실이었다.
만석거(수원시 향토유적 제14호)
경기 수원시 장안구 송죽동 346
수원화성은 효심으로 시작된 성곽이었지만,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이자 새로운 세상의 구상을 위한 과학적 도시 조성 기법으로 만든 계획적 신도시이기도 했다. 정조대왕(이하 정조)은 수원화성 축성 시기, 극심한 가뭄이 들자 구휼 대책과 안정된 농업경영을 위해 만석거를 조성하기로 다짐한다.
당시 수원성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네 개의 호수를 파고 방죽을 축조했는데 서쪽은 수원시 서둔동의 축만제, 남쪽은 화성시 융릉 앞 만년제, 그리고 1795년 북쪽에 조성한 방죽을 만석거로 칭했다. 동쪽에는 지동을 축조했으나 현재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만석거 축조는 다양하고 안정적인 농업경영을 펼치게 했다. 당대 최신식 수문과 수갑을 설치해 농업용수로 이용했고, 대유둔과 서둔 등 국영농장도 마련했다. 만석의 쌀을 생산하고픈 염원에서 지은 ‘만석거’의 꿈은 이루어졌다. 쌀 만석 이상을 더 생산한 것. 각 궁에 속한 토지인 둔전(屯田)의 성공으로 수원의 백성들은 배고픔에서 벗어났으며 수원화성을 운영할 재원도 충당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저수지 가운데에 작은 섬을 만들고, 조금 높은 곳에 정자 영화정을 세워 주변의 풍경까지 즐기게 했다. 현재 만석거의 농업용수 역할은 사라졌지만, 그 가치는 2017년 세계관개시설물유산 등재로 이어졌다. 백성을 고귀한 존재로 여기고 그들의 삶과 질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던 정조의 산실이다.
만석공원은 만석거가 축조된 200여 년 후인 1997년, 현대인의 삶을 위해 조성됐다. 잔디언덕을 따라 이어진 소나무숲과 갈대숲 등 생태숲이 펼쳐지는 이곳엔 테니스장, 축구장, 배드민턴장 등 다양한 운동시설도 마련돼 있다. 만석공원을 만들면서 만석거의 옛 일부는 매립돼 대거 축소됐지만, 작은 섬과 영화정 등 옛 모습이 잘 보존돼 있다. 현재 영화정 정자는 북쪽으로 옮겨 새로 복원되었고, 원래 있던 자리에는 표지석만 남았다. 희미했던 역사의 기억도 간직할 수 있도록.
1931년 일제강점기, 만석거도 이름을 잃어버렸다. 굴곡의 역사를 지닌 채 일왕저수지로 불리며 이어진 이름은 지난 2020년에 되찾았다. 많이 늦었지만, 늦게라도 바로잡아 다행이다. 정조가 품은 백성을 향한 정체성은 그대로일 테니까.
글 정수희 사진 봉재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