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교차하는 평범한 풍경 속, 저마다의 삶을 통과하는 숨들을 품은 성곽은 일상이지만 상상 속 이야기 같다.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만난 듯 환상처럼 보이는 도시, 수원의 행궁동을 찾았다.
화홍문을 지나는 수원천 어린 물살이 아침의 햇살 아래 황금처럼 빛난다. 정조가 내려다보았던 연못 위로 오리 가족이 날개를 동당거린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거대한 성곽길에는 산책 나온 주민들이 평온히 지나고, 장안문 아래로는 출근길 시민들의 발걸음이 바쁘다.
수원화성, 이 아름다운 성은 존재 자체가 과거이자 현재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거의 허물어지다시피 한 것을, 축조 당시 상황을 고스란히 담아 놓은 <화성성역의궤> 덕분에 원 상태에 가깝게 복원했다. 덕분에 우리가 만나는 수원화성은 지금 이 자리에 생생하다. 분명 과거의 것인데, 세월이 켜켜이 쌓여 바래지 않았다.
수원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는데, 원본 건축물만 인정하던 유네스코의 기존 등재 기준을 생각하면 대단히 이례적이다. 현대에 만들어졌으나 과거의 것이기도 한 수원화성, 그만큼 특별하다.
이곳에는 또한 삶이 서려 있다. 특히 정조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데, 화성 자체가 정조의 아버지인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민가와 시가지를 옮기며 만들어졌음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적과 싸우기 위해 필요한 성이라는 신하들의 볼멘소리에도 “아름다움이 적을 이기느니라. 아름답게 지으라”라고 명했다는 이야기부터, 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에게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임금을 지급하거나 약과 털모자를 나눠주었다는 이야기, 방화수류정에 올라 용연의 아름다운 풍경을 내려다보았다는 기록까지 크고 작은 일화가 다양하다.
건축되고 파괴되고 다시 건축되었던 200여 년의 세월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성벽만큼 길고 깊은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수많은 감정과 기억, 아픔, 그리고 극복을 쌓아 올린 성은 화성(華城)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 옛날 왕의 명령처럼 정말 아름다운 성이 되었다.
화성행궁의 정문, 신풍루(新豊樓). 커다랗게 걸린 현판 위 글자를 가만가만 눈으로 쓸어본다. 신풍은 ‘임금의 새로운 고향’이란 뜻이다. 정조는 어떤 마음으로 이곳을 새로운 고향이라 불렀을까. 수원화성은 정세 쇄신과 왕도정치 구상을 위해 정조가 신중히 계획하고 추진한, 정치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신도시였다. 그런데 행궁에서는 국왕인 정조보다 오히려 사람 이산(정조의 휘)이 더 많이 묻어나는 것 같아 흥미롭다. 노후 생활을 꿈꾸며 지은 노래당(老來堂)이나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수원에 내려와 노년을 즐기고자 했던 마음을 보여주는 미로한정(未老閒亭) 같은 이름이 그렇다. ‘늙어서 한가히 쉴 정자’라는 뜻의 미로한정은 행궁 후원 서쪽 높은 언덕에 지어진 정자로,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행궁 풍경이 퍽 아름답다. 행궁 너머로 수원천과 인근 건물들이 보인다. 미로한정에서 행궁 너머 민가 내려다보길 좋아했다는 정조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것도 같다.
행궁 앞 광장을 가로질러 미술관에 들어가는 길, 보도 위에 그려진 거대한 그림 위를 지난다. 발아래 펼쳐지는 형형색색의 화려한 그림, <봉수당진찬도>이다.
행궁 마당과 ‘정조로’가 닿는 지점. 신풍루와 오른쪽으로 마주하는 자리에 수원아이파크시립미술관이 서 있다. 행궁 앞 광장을 가로질러 미술관에 들어가는 길, 보도 위에 그려진 거대한 그림 위를 지난다. 발아래 펼쳐지는 형형색색의 화려한 그림, <봉수당진찬도>이다. 수원화성이 완공되기 1년여 전,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을 모시고 장헌세자의 무덤에 다녀오며 행궁의 봉수당(奉壽堂)에서 어머니의 회갑연(진찬연)을 열었다. 당시 상황을 세밀히 묘사해둔 게 <봉수당진찬도>인데, 미술관 앞쪽 광장 보도 위에 이를 크게 옮겨 놓았다. 파란 겨울 하늘 아래, 현대적 디자인의 미술관과 200여 년 전 잔칫날을 표현한 진찬도가 함께 있는 풍경이 신기하게도 잘 어울려서 한참을 바라봤다.
주로 현대 미술 작품을 전시하는 수원아이파크시립미술관은 건물 자체의 현대적 미로도 유명하다. 경사진 구획과 회색, 검은색, 흰색으로 꾸며진 무채색 공간은 기존의 것과 오래된 질서에 끝없이 물음을 던지는 현대 예술 작품의 목소리를 훌륭히 증폭한다. 도전과 변화, 개혁과 창조 정신의 상징과도 같은 수원화성의 한복판, 행궁 바로 앞에 자리하기로 손색없다.
수원화성은 신기한 곳이다. 현대와 과거가 공존하는 특별함을 소유하면서도, 흔히 엄숙한 유적지처럼 삶에서 동떨어져 있지 않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일상을 향유한다. 행궁동 벽화마을은 이곳이 단순히 유적지, 관광지가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곳임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수원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등 일대가 유적지화 되면서 행궁동에 살던 주민들은 집을 고치거나 건물을 새로 올리기가 대단히 어려워졌다. 그렇게 조금씩 낡고 헤져가는 동네를 방치할 수 없어서 여러 예술가와 시민단체가 주민들과 함께 팔을 걷어붙였고, 파스텔 톤 벽화마을이 탄생했다. 벽화를 이루는 붓 결을 따라 여러 마음과 소망이 진하게 녹아났을 골목. 그 사이를 돌다 문득 눈을 들어 보니, 노란 담장 너머 파란 하늘 아래, 함께 모인 산수유 열매들이 겨울 햇살 아래 참 잘도 익었다. 같이 익었기에 더 붉다.
벽화마을 바로 옆으로는 다양한 음식점과 즐길 거리로 가득한 골목길이 이어진다. 오래된 세탁소 옆에는 세련된 가죽 공예 가게가 함께 살고, 스티커사진 부스 옆으로 여전히 작은 손수레가 지나가는 길.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행리단길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골목. 익숙한 주민들의 삶 위로 관광객들의 설렘이 녹아들고, 그렇게 삶이 또 다른 얼굴로 웃는다.
조금씩 낡고 헤져가는 동네를 방치할 수 없어서 여러 예술가와 시민단체가 주민들과 함께 팔을 걷어붙였고, 파스텔 톤 벽화마을이 탄생했다.
▶ 화성의 북수문인 화홍문. 한낮에 찾으면 수문 아래로 황금같이 부서지는 윤슬을 만날 수 있다. 바로 옆 방화수류정에서 내려다보는 용연의 모습은 CNN ‘한국의 아름다운 곳 50선’에 선정됐다. 아름다운 풍경 덕분에 피크닉 성지로 불릴 만큼 인기가 많다.
▶ 행궁 뒤편 언덕길을 따라가면 미로한정에 오른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행궁의 풍경은 특히 아름답다. 소박한 정자이지만 운치가 있어, 화가 김홍도는 가을 국화가 가득한 미로한정의 모습을 <한정품국>으로 남기기도 했다.
▶ 주로 현대 미술 작품을 전시한다. 미술관 입장권 없이 내부 카페를 이용할 수 있어 공간 자체의 아름다움을 느끼기에 손색없다. 건물 앞 광장 위 <봉수당진찬도> 등 여러 그림 속 등장 인물의 표정과 몸짓을 찾아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다.
▶ 아기자기한 카페와 독특한 소품점,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는 음식점으로 사랑받는 행궁동 골목길이다. 동네의 오래된 건물을 조화롭게 활용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그 해 우리는> 등 최근 종영한 유명 드라마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글 정희화 사진 봉재석 영상 전한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