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찾지 않는, 제 기능을 잃어버린 공간에 생명을 불어넣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전북 완주군에 위치한 ‘산속등대’는 20년간 폐허로 남아 있던 종이공장을 리모델링해 새롭게 조성한 복합문화공간이다. 을씨년스럽던 장소가 문화와 휴식을 즐기는 생명력 넘치는 장소로 변화한 지금, 이곳에는 날마다 새로운 파도가 일렁이고 있다.
삶의 재미는 외외성에 발견된다. 관광지로 유명한 전북 전주시의 전주역에서 차량으로 불과 20여 분 달리면 뜻밖의 이정표를 만난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 해월리 숲 복판에 우뚝 서 있는 빨간 등대가 보인다. 길 잃은 나그네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듯한 막강한 존재감에 이끌려 계속 달리다 보면 마침내 복합문화공간 ‘산속등대’에 다다르게 된다. 울창한 산림에 둘러싸인 드넓은 공간이다. 무려 8000여 평인 이곳에는 곳곳에 세월을 짐작하기 어려운 만큼 오래돼 보이는 구축 건물과 신축 건물이 나열돼 있어 지난 시간을 절로 궁금하게 만든다.
산속등대가 처음 문을 연 시기는 2019년도였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이전에 이 자리를 차지고 있었던 것은 거대한 제지공장이었다. 수백 명의 노동자가 일하며 호황을 누렸던 이곳은 조선시대 전주한지의 주생산지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안타깝게도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시대가 변하면서 종이의 수요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결국 제지공장들은 경영난을 이기지 못해 문을 닫게 된다.
수많은 사람의 삶을 책임지던 제지공장에는 거미줄과 멋대로 자란 잡초가 뒤덮이기 시작했고, 그렇게 이곳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다. 20년간 잠자고 있던 공간은 2019년, 산속등대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이곳을 다시 세상 밖으로 끌어낸 것은 산속등대 복합문화공간의 운영자인 원태연 대표였다. 그는 이 공간을 둘러보면서 높게 솟은 굴뚝에 매료됐고 어린이와 청소년은 물론, 도민과 외지인들 모두에게 다양한 문화예술을 알리는 동시에 등대처럼 빛을 비춰줄 수 있는 곳이 되길 꿈꿨다. 3년간의 준비 끝에 산속등대는 마침내 문을 열었다.
지금의 산속등대는 이름처럼 깊은 숲속에서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등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지름 3m, 높이 33m에 달하는 빨간등대를 비롯해 미술관, 어뮤즈월드(체험), 공연장, 수생생태정원, 슨슨카페 등으로 구성한 산속등대는 탁 트인 시야로 도시민 마음 속에 여유를 불어넣는다. 무엇보다 기존 건물들을 재활용해 새로운 용도로 탄생시킴으로써 환경 보호와 도시 재생의 의미를 완성하고 있다.
로마의 콜로세움처럼 보이는 야외공연장은 기존 폐수처리장을 이용해 만들었다. 시간의정원은 기존의 폐산업 시설을 변신시킨 곳이며, 개구리연못에서는 물고기와 오리, 개구리를 볼 수 있어 자연스레 생태공부도 가능하다. 무엇보다 잔디밭 곳곳에는 번성했던 제지공장의 빛바랜 시설이 보인다. 당당히 한몫했던 기계들이 자신들의 영광을 잊지 말라는 듯 당당한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다.
어뮤즈월드는 어린이와 청소년의 발걸음이 가장 분주히 오가는 곳이다. 어린이와 청소년 전용공간으로 다양한 체험을 경험할 수 있어 창의력과 상상력, 호기심을 키우기에 충분하다. 빨간등대 옆의 고래놀이터도 명물이다.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있는 흰수염고래 조형물은 아이들이 고래 입속을 들락거리며 놀기에 충분할 정도로 크고, 모래사장 위에 자리를 잡고 있어 숲속에서도 바닷가 느낌을 만끽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한쪽에 커다랗게 자리잡고 있는 슨슨카페를 목표로 찾아오는 손님들도 많다. 산속등대의 첫 자음 ‘ㅅㅅㄷㄷ’를 조합해 만든 이곳은, 제지공장의 원형은 최대한 살리되 통창으로 숲속의 빛을 품었다. 길이가 무려 720㎝ 우드슬랩 테이블은 근사함을 더한다. 테이블 간 간격이 넓어 사람에게 방해를 받지 않은 채 고요한 시간을 즐길 수 있다.
산속등대 복합문화공간에서 갤러리는 꼭 들러봐야 할 곳이다. 문화의 불모지로 꼽히는 지방에서 이만한 크기의 갤러리를 만나는 건 쉽지 않은 일. 게다가 시기별로 다양한 주제로 열리는 전시회는 방문객들의 문화감수성을 충족시키고 자극하는 데 큰 위력을 발휘한다.
전시회는 그림부터 드로잉, 사진 등 다양한 장르를 포용한다. 개관 초대전으로 심은솔 작가의 ‘무의식의 드로잉’ 전을 개최해 인간의 본성과 본질에 좀 더 다가가려는 다양한 작품을 선보여 관람객의 큰 호응을 얻었고, ‘불편한_여행을 통通 해海’ 사진전은 산속등대지기인 원대연 대표이사와 직원들 그리고 최욱 작가가 9박 10일 동안 다채로운 등대와 아름다운 겨울바다를 산속등대로 옮겨 온 전시회였다. 산속등대미술관과 전주기상지청의 협업으로 이루어진 ‘현상과 마주하다_기상기후 사진展’ 또한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기상이 남긴 여러 현상을 순간 예술로 표현하여 기후와 환경에 대한 관심을 제고하고 경각심에 대한 메시지를 표출해 이곳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경각심과 자연의 위대함을 일깨우기도 한 것.
최근에는 ‘산속으로 들어온 등대’ 전시회를 펼쳤다. 산속등대의 기록과 김무창, 서상현, 신준오, 이건호, 조현민, 최용창 등 6명의 작가들이 만들어 낸 등대 이야기와의 만남으로 관람객의 시선을 한껏 사로잡았다.
올해 4년 차를 맞이한 산속등대는 지난 3년간 코로나19로 인해 운신(運身)의 폭이 자유롭지 못했던 것에서 탈피, 좀 더 지역사회에 가깝게 다가가기로 목표를 설정했다. 완주군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어린이와 청소년, 어른들을 산속등대로 더 깊숙이 이끌어, 끝없는 문화의 바다를 함께 향유하자는 꿈을 꾸고 있다. 이를 위해 체험과 경험은 더욱 강화될 것이며 플리마켓, 아트페어 개최, 사생대회 등 가장 가까운 곳에서 즐기는 참여형 문화공간으로 그 소임을 다할 예정이다.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문화공간으로 거듭나기”를 소리 높여 외치고 있는 산속등대, 그 빛나는 빛을 따라 우리도 한번 그 여정에 동참해보면 어떨까?
전북 완주군 소양면 원암로 82
글 이경희 사진제공 산속등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