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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면의 블렌딩

삶의 곁에 사람

호미로 세상을 일구다 낫으로 세월을 베다

춘천 강동대장간 박경환 대장장

농경사회였던 우리나라에서 대장간은 동네마다 꼭 있어야 했던 곳이다. 대장장이가 매운 손맛으로 만들어낸 야무진 농기구는 농민에게 풍년의 꿈을 꾸게 하는 시작점이었다. 1963년 처음 문을 열어 지금까지 메질 소리가 멈추지 않는 춘천의 노포 ‘강동대장간’을 찾아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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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쇠를 다루다

대장간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깨끗하다. 얼핏 지나다가 보면 농기구를 컨셉으로 잡은 레트로 카페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감각적이다. 춘천시향토문화유산(무형) 제1호로 지정된 강동대장간의 첫인상은 대장간이지만 대장간 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땅! 땅! 땅! 추위에도 땀을 흘리며 쇠스랑에 메질을 하는 사람이 바로 이곳의 2대 주인 박경환 대장장, 그 옆에서 보조를 하는 사람이 기능전수자 아들 박성경 씨다. 카리스마 넘치는 아버지와 묵묵히 일하는 아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아버지(故 박수연 대장장)께서 처음 대장간과 인연을 맺은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산에서 땔감을 베어다가 소양강대장간에 갖다 팔았는데 그곳 대장간 어르신이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좋았던 아버지를 보곤 대장간 일을 배우면 어떻겠냐고 권유를 하신 거죠. 그렇게 해서 저희 집안과 대장간의 인연이 시작됐습니다.”

박경환 대장장은 아버지가 한창 대장간 일을 할 당시만 해도 자신이 가업을 잇게 될 줄 몰랐다고 한다.

“저는 열처리, 표면처리 직종에서 근무하다가 춘천으로 내려왔어요. 그리고 아버지 대장간 근처에 낚시 가게를 열어 운영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께서 자꾸 도와달라고 부르시더라고요. 대장간에 드나들면서 메질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일을 배우게 됐고, 나중에는 본격적으로 하게 됐습니다. 제가 대장간 일에 매료됐던 이유는 누구 눈치 볼 필요가 없다는 것, 몸으로 정직하게 일해 일한 만큼 벌어간다는 것이었죠. 전 누구한테 굽실거리는 게 싫었거든요(웃음).”

1963년에 출발했던 강동대장간의 역사는 1996년, 그렇게 물 흐르듯 2대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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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기구는 각(角)의 예술이다

대장장이 일을 한 지 30년이 다 되어 가지만 박경환 대장장은 아직도 아버지의 솜씨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호미만 해도 열 종류가 넘어가는 수많은 농기구를 100% 핸드메이드로 온 힘을 다해 만들지만 불과 몇 달 전에 만든 제품을 봐도 아쉬운 점이 보여서 마음이 상한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만들었던 호미의 유려한 아름다움을 떠올리던 박경환 대장장은 “호미를 완성하는 데만 10년이 걸렸다”는 말로 장인의 깐깐함을 고스란히 내비친다.

요즘 세상에 대장간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신기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강동대장간은 지난 세월 동안 수많은 단골을 만들어낸 곳이다. 그 비결은 하나다. 단골이 아니라 뜨내기손님이라도 한번 써보면 다시 찾지 않고는 못 배기는 높은 품질과 사용 편의성 때문이다.

“적재적소에 좋은 재료를 쓰면 좋은 물건이 나옵니다. 이건 기본 중의 기본이에요. 철도 종류가 많은데 낫이나 호미, 쇠스랑 등 모두 그 용도에 맞는 철을 써야 좋은 물건을 생산할 수 있거든요. 용도에 따라 철을 단련하고 연성을 조절해서 하나하나 맞춤형으로 만드는 정성이 들어가야 합니다.”

박경환 대장장은 농기구를 만들 때 해머를 쓰는 대신 직접 메질한다. 벌겋게 달아오른 철을 살피면서 쉼 없이 하는 메질은 음식으로 치면 밀가루를 치대는 것과 비슷하다. 밀가루 반죽이 많이 치댈수록 쫄깃하고 탄성이 높아지는 것처럼 메질 역시 많이 해야 조직이 치밀해지면서 보다 견고하고 완성도가 높은 물건이 나오기 때문이다.

메질을 마칠 때마다 농기구를 매의 눈으로 살피는 것 역시 이유가 있다. 낫, 호미 같은 농기구는 결국 각(角)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이는 결코 단시간에 익힐 수 없는 것으로 오랜 시간 안에 축적된 경험과 노하우로 비로소 완성된다. 낫자루, 호미 자루 하나까지 자작나무를 직접 말리고 깎아서 쓰는 고집. 남의 물건을 떼어다가 내 것인 양 팔지 않는 자존심과 자부심. 강동대장간이 대를 이은 가업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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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의 예술가, 100%를 꿈꾸다

2023년 대장간과 대장장이의 위상은 과거에 비해 사뭇 달라졌다. 그 옛날에는 먹고 사는 데 꼭 필요한 필수품을 만들어내는 기술이자 기술인이었지만 대장간과 대장장이들이 확연히 줄어든 지금, 이들은 보존해야 할 우리 문화유산이자 민속문화 중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가업을 잇고자 대장간 기술을 전수받고 있는 3세 박성경 씨의 존재는 더없이 소중하다.

“아들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대장간 일을 배웠어요. 제가 학교에다가 직접 방학 때 수업을 받는 대신 대장간 일을 배울 수 있도록 해달라고 편지를 썼지요. 우리 전통을 지켜야 하니까요. 다행히 아들은 자연스럽게 대장간 일을 받아들이고 지금 열심히 일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훗날 대장장이로서 박성경 씨의 역할은 지금과는 다른 방향성을 가질 것이다. 할아버지가 농기구 제작에 충실했다면 아버지 박경환 대장장은 농기구 제작에 더해 교육청 공모사업으로 학생들의 체험수업과 교육을 병행한다. 그리고 아들인 박성경 씨는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그 영역을 더 확장할 예정이다.

“대장간 일도 중요하지만 지금 시대는 그 이상을 요구하고 있어요. 요즘 융합이니 4차 산업이니 많이들 얘기하는데, 우리 대장간 일도 사회적으로 영역을 더 넓혀야 합니다. 아들에게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장장이로서 석사, 박사까지 마쳐야 한다고 조언하는 이유입니다. 그 과정이 사회에서 더 많은 역할과 기회를 가져다줄 테니까요.”

가업을 통해 우리 전통을 잇고 그 전통을 미래까지 이끌어가겠다는 사명이 더 이상 개인적인 욕심이 아니게 된 지금, 박경환 대장장은 바라는 것이 있다. 바로 지자체와 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이다. 먹고 사는 기본적인 문제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야 우리 전통 기술을 더 발전시키고 후진들을 양성할 수 있다고 소리를 높이는 그에게서 희미한 분노와 포기할 수 없는 자기 일에 대한 긍지가 느껴진다.

농기구는 작물에 따라, 계절에 따라 다르게 만들어져야 한다. 어떤 기구는 흙을 갈라야 하고 어떤 기구는 흙을 채집해야 한다. 땅이 얼어붙는 계절에는 날도 다르게 만들어야 한다. 연구하고 공부해 늘 가장 좋은 농기구를 만들어내려는 박경환 대장장의 도전과 욕심이 지속되는 이유는 바로 이 같은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농기구 제작은 언제나 100%를 향해 가는 길입니다. 그 길을 저는 여전히 쉬지 않고 걷고 있는 중이에요.”

어지러운 곳에서 어지러운 물건이 나온다며 언제나 대장간을 안방처럼 관리하고 치우는 박경환 대장장. 세계 최고 품질의 농기구는 그렇게 그의 열정과 진심을 담은 손에서 켜켜이 빚어지고 있었다.

이경희 사진 김정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