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작물인 구아바, 레몬, 라임, 아스파라거스 등이 우리나라에서도 생산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엔 기후변화를 기회 삼아 300여 종이 넘는 아열대작물을 연구하고 재배하는 열대정글농장의 대표, 박철경 농부가 있다. 그는 베트남에서 이주해 온 아내와 함께 열대작물을 재배하며 우리 농업의 새로운 미래를 개척 중이다.
섬진강변을 따라 지리산 청학동으로 향하는 길목인 하동 여의리에 이르면 바람에 일렁이는 비닐하우스 물결과 만나게 된다. 14개 동에 이르는 이 비닐하우스에서는 300여 종의 열대작물이 군락을 이루며 자라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박철경 농부의 ‘열대정글농장’이다.
올해로 귀농 9년 차를 맞는 박철경 농부는 오래전 호텔의 식음료 파트에서 일했다. 이후 서비스업에 눈을 뜬 그는 식품 관련 자영업을 시도했으나, 외환위기(IMF)로 어려움을 겪으며 사업을 정리하고 고향인 하동으로 내려왔다.
“처음 고향에 왔을 때는 부모님과 함께 벼농사를 지었어요. 그런데 수익 측면에서 벼농사는 비전이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특수작물이나 열대과일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호텔에서 일할 때 열대과일의 수요는 많지만, 국내 생산은 미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레몬이나 라임을 재배한다면 경쟁력을 갖게 될 것으로 생각했어요.”
실제 그의 예상대로 몇 년 사이 열대과일의 수요는 급증했다. 소비자들의 입맛 변화와 다문화 가정의 증가로 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희소성과 가격 측면에서 경쟁력을 갖췄다고 해도 겨울이면 영하로 내려가는 우리나라에서 사계절 따뜻해야 하는 아열대작물을 키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엔 모종이나 묘목을 구하는 것부터가 어려움의 연속이었어요. 다른 작물은 농촌진흥청 같은 곳에서 체계적으로 도움을 받으며 생산할 수 있는데, 열대작물은 그런 체계 자체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으니까요. 유튜브도 보고, 동호회도 찾아다니고, 열대작물을 먼저 재배했던 선도 농가들도 만나 신뢰를 쌓으며 공부했어요.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한계가 있더라고요. 결국 제가 직접 발품을 팔며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 중국 등 원산지로 가서 공부를 해야 했어요.”
그렇게 백방으로 돌아다니며 열대작물 종자 수집에 노력을 기울인 결과 그는 지금의 열대정글농장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레몬과 라임 분야에서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품종을 가진 농부가 되었다. 이제 그는 국내 열대작물의 선두 주자로 어떤 품종이 우리 실정에 맞고, 어떤 작물이 상품성과 판로 개척에 유리한지 판단할 수 있는 전문가가 되었다.
열대작물의 모종과 묘목을 구하기 위해 해외를 오갔던 박철경 농부는 베트남에서 지금의 아내 레티카미씨를 만났다. 귀농 이후 결혼에 대한 생각은 접어두고 있었는데, 열대작물이 인연이 되어 운명처럼 아내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렇게 2019년 국제결혼을 했고 현재는 34개월 된 딸과 함께 농장에서 생활하고 있다. 베트남 껀터에서 한국으로 이주해 온 아내는 박철경 농부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열대작물 재배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아내는 환경적으로 이 작물들을 보고 먹으며 자라온 사람이라 어떤 품종이 맛있는지, 어떤 품종이 생산성이 좋은지 그냥 알더라고요. 저는 잘 모르니까 막 혼입해서 재배하고 그랬거든요. 지금은 아내가 선택하는 품종의 생산을 늘리고 다른 품종은 도태시키면서 자리를 잡아 가고 있어요. 열대작물의 경우 최대한 그 작물이 자라온 풍토에 맞춰서 재배하려고 노력하는데 사실 원산지 그대로를 따라할 수는 없어요. 만약 그렇게 해준다고 해도 환경 요소들이 다르기 때문에 잘 자라지 못하는 게 현실이죠. 결국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품종과 그 품종의 판로를 찾는 게 핵심인데 그런 부분에서도 아내는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열대정글농장의 안주인이 된 레티카미씨는 열대작물의 재배는 물론 판매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레티카미씨가 SNS를 통해 국내 다문화가정의 커뮤니티에 농장의 사진들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이를 본 많은 이주민이 주문을 해온 것이다.
박철경 농부는 열대작물을 재배하는 많은 농가가 판로개척에 어려움을 겪는데, 그런 점에서 자신은 아내의 덕을 보고 있다고 했다. “제가 구아바를 생산해서 로컬푸드에 냈을 때는 향과 맛이 이상하다고 잘 안 팔렸거든요. 그런데 아내가 SNS를 통해 동남아나 베트남에서 이주한 분들에게 소개하기 시작하면서 정말 많은 분이 주문을 해주시더라고요. 그분들은 또 직접 키우시겠다고 묘목도 주문하십니다.”
최근 열대정글농장의 주력 상품은 체리다. 사실 박철경 농부는 귀농 초기 열매가 열리지 않는 체리 나무를 식재해 전량 폐기한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5년 전 다시 심은 체리 나무에서는 꽃도 피고 열매도 맺기 시작했다. 그는 앞으로 체리 나무의 규모를 8천 평까지 늘려 20톤가량의 생산량을 만들어 갈 계획이다. 만약 지금의 속도로 안정적인 수확량을 보인다면 연 매출의 증가세도 매년 억 단위로 이어지리라 전망한다.
“우리 농장에서 생산된 체리는 로컬푸드로 나가기 전에 농장에서 모두 판매가 되고 있어요. 제가 체리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체리가 고객 흡인력이 좋은 작물이라는 거죠. 제 목표는 체리 체험농장을 만들어서 농가 단위로는 최대 규모의 체리축제를 개최하는 거예요. 상품을 팔기 위해 제가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고객들이 농장으로 찾아와 체험하고 즐기는 그런 구조를 생각하고 있어요.”
국내에 없던 새로운 작물을 재배하고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길이 아닌 자신의 길을 개척하며 틈새시장과 블루오션을 찾아가고 있는 박철경 농부. 그는 이제 농가형 체험 축제를 통해 6차 산업 활성화를 꿈꾸고 있다.
끝으로 박철경 농부는 귀농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귀농 전 땅을 사거나 집을 짓는 일을 먼저 하지 말고 귀농할 지역에 가서 대여 혹은 임대로 살아보고 결정하라는 것이다. 또 자신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이웃들과 친분을 쌓은 뒤 작물 선택에도 도움을 받는다면 보다 성공적인 귀농 생활이 될 것이라고.
글 문진영 사진 손호남 영상 전한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