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도’라고 하면 얼핏 긴 칼을 떠올린다. 그러나 장도에서의 장은 ‘단장할’ 장(粧)을 쓰는, 칼집이 있는 작은 칼을 일컫는다. 우리에게는 여인이 지조를 지키고자 자신의 목에 들이대는 은장도의 이미지가 크지만, 우리나라의 장도는 고려시대부터 올곧은 의미가 담겨 있는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높은 가치를 자랑해 왔다. 아버지 故 박용기 옹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수자인 아내, 아들까지 3대가 장도장에 종사하고 있는 박종군 무형문화재를 만나 장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전남 광양시에는 광양장도박물관이 있다. 1978년 장도장으로는 처음으로 무형문화재가 된 고 박용기 옹이 전 재산을 광양시에 기부하면서 지어진 장도박물관이다. 대규모 박물관은 아니지만 전시실과 작업실, 체험실까지 두루 갖춘 이곳은 장도의 역사와 쓰임, 만듦까지 모든 것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다.
취재진을 맞은 것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장도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는 무형문화재 박종군 장도장이다. 칼을 다루기 때문일까? 호쾌한 성품과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이 그대로 느껴지는 풍채가 여간 당당하지 않다.
“장도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던 것 같습니다. 집에 작은 장도들이 굉장히 많았던 게 기억이 납니다. 어린 마음에 그것들이 너무 예뻐서 장난감으로 생각해 갖고 놀았어요. 그때 어렴풋이 우리 아버지는 칼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던 것 같아요.”
어린 시절, 장도는 예뻤지만, 집안 환경은 그렇지 못했다. 아버지는 장도만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고 그 외 집안의 모든 대소사는 어머니가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빚을 내 장도 재료를 사고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다 보니 빚쟁이들이 노상 집에 찾아왔고, 박종군 장도장은 육성회비를 내지 못하는 일이 허다했다.
“어머니는 빚쟁이를 상대하는 것부터 느닷없이 안 나오는 직원들에게 밥을 차려주며 어르고 달래는 일, 장도 판매까지 모든 걸 하셨어요. 그게 너무 힘드니까 제게는 공부 열심히 해서 교사가 되라고 하셨죠.”
그러나 박종군 장도장은 생각이 달랐다. 아버지께서 고생하시니까 빨리 학교를 졸업해서 아버지 일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고등학교에서 미술부 활동을 했던 그는 “기술만 갖고는 안 된다. 장도에 관한 연구, 스토리텔링이 있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권유에 대학까지 진학해 미술 공부를 했다.
박종군 장도장이 장도에 대해 본격적으로 깨달음을 얻기 시작한 것은 논문을 쓰면서부터였다. 1980년대 당시에는 장도에 관한 여러 논문이 쏟아져 나왔던 시기였는데 저자들은 저마다 쓴 논문을 아버지께 보냈고, 그것을 본 아버지가 엉터리라며 혀를 끌끌 찼던 것이다. 결국 박종군 장도장은 자신이 제대로 된 논문을 써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수많은 전문가와 박물관 등을 찾아다니면서 ‘장도’에 대한 연구를 거듭했다. 오류를 바로잡고 모호했던 의미를 정확히 하면서 장도에 대한 공부가 일취월장으로 이루어진 시기였다.
도신(刀身), 칼자루, 칼집으로 이루어진 장도는 굉장히 만들기가 어려운 공예품이다. 세 개 중 어느 하나라도 완성도가 떨어지면 균형이 깨져버리고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잃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장도는 노련한 기술만으로는 그 격을 갖출 수 없는, 충절과 정절의 상징이자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해 온 예술품이자 생활용품이었다. 왕과 왕비는 물론, 장군, 선비, 사대부 아녀자, 서민들까지 남녀노소, 계층을 막론하고 가질 수 있었던 민주적인 공예품이기도 했다.
“장도는 종합예술입니다. 어느 한 가지만 다뤄서는 장도를 만들 수가 없어요. 철을 다룰 줄 알아야 하고 장식을 위해서는 금, 은, 동, 비치, 옥 등 다양한 귀금속을 만질 수 있어야 해요. 칼집은 또 뭐 뭘로 만들겠습니까? 나무로 만들 수도 있고 뼈로도 만들 수도 있고 뿌리로도 만들 수 있어요. 어떤 작업이 가장 중요하냐고 종종 사람들이 물어오는데, 이 중 한 가지라도 빠지면 장도가 아니거든요. 평생을 배워도 다 못 배우는 게 장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버지에게 배운 기술에 더해 오동상감을 배우러 남원에 가고 오죽장을 배우러 임실에 가고 장인들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다는 박종군 장도장에게서 오랜 세월 단 하나의 가치만을 파고든 장인의 고집스러움과 우직함이 느껴진다.
박종군 장도장의 안내로 관내 작업실로 이동해보았다. 장도장 이수자인 아들이 한창 작업 중이다. 그 분위기가 어찌나 진지하고 엄숙한지 목소리를 크게 내기도 어렵다.
작업장에는 故 박용기 옹 때부터 써오던 낡고 오래된, 세월의 흔적이 겹겹이 내려앉은 도구들이 가득하다. 금속을 녹이는 화덕, 화덕에 공기를 넣는 풀무, 장도의 장식과 부속품의 형을 잡는 데 사용하는 보래, 거도, 토간, 모루, 쇠망치, 줄, 숫돌, 가위 등 그 종류와 모양이 어찌나 많고 다양한지 입이 절로 벌어진다.
장도가 만들어지기까지는 모두 177개의 공정이 필요하다고 한다. 강철을 제련해 칼을 만드는 과정부터 다양한 재료를 깎고 다듬어 장식과 모양을 내 칼자루, 칼집을 만드는 시간들, 조립해 완성하는 그 길고 긴 과정에 결코 쉬운 순간은 없다. 그 지난한 작업을
3대가 기꺼이 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장도의 가치를 후세대에 전한다는 사명감, 그리고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우리 장도가 품고 있는 역사와 의미 때문이다.
“제가 중학교 때 일이었어요. 웬 아저씨가 제 또래 딸의 손을 잡고 저희 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딸이 이제 야간학습을 시작하는데 밤길이 무서우니 호신용으로 장도를 하나 사고 싶다는 거였죠. 그렇게 장도를 사가고 난 뒤 잊고 살았는데 십수 년이 지나 어느 날 웬 여자분이 네 살배기 딸 손을 잡고 저희 가게에 찾아왔습니다. 중학교 때 아버지께 선물 받았던 장도를 수리하고 싶다고요. 그분에게 장도는 그때까지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던,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의미 깊었던 물건이었던 거죠. 시대를 초월해 사람들이 장도에 부여하는 의미는 변하지 않습니다.”
변치 않는 장도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박종군 장도장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현재 박종군 장도장은 사단법인 국가무형문화재기능협회의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그에게 이 자리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무게를 가진다. 무형문화재의 미래가 소멸 위기에 처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무형문화재는 200종인데 전수 장학생은 80명입니다. 우리 무형 기술을 이어받을 사람이 없어요. 모든 예산과 관심은 유형문화재에 쏠려 있습니다. 유형문화재 기왓장이 떨어지거나 탑 어딘가가 부식되면 당장 달려가서 수리하고 복원합니다. 하지만 무형문화재가 아프면 그냥 그건 개인이 알아서 할 문제인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 무형문화재가 오래 전승되길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지요.”
그의 목소리가 안타까움과 간절함으로 돌연 높아진다.
아버지 박용기 옹이 숙련된 기술로 장도를 완성했다면 아들인 박종군 장도장은 무형문화인 장도의 비전을 제시하고 인프라를 구축했다. 이제 3대로 내려가면 우리 장도에는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 답을 찾기 위해 아버지와 아들은 오늘도 쉼 없이 달리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우리는 장도에 담긴 가치와 의미를 찾으며 그 역사적 현장을 지켜보는 중이다.
글 이경희 사진 손호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