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면의 블렌딩

삶의 곁에 사람

문화유산을 수호하는 손길과 시선
깊은 울림을 선사하다

문화재청 대목수 정명식

정명식 작가는 문화재청 소속 대목수이자 문화유산을 촬영하는 사진가로 활동 중이다. 그의 일상에는 연장과 카메라가 늘 함께한다. 수단도, 작업 방법도, 표현 방식도 다르지만, 목표는 하나로 수렴된다. ‘과거’의 것을 잘 지키는 일을 넘어 ‘어제와 오늘’을 엮고 마침내 후손과 옛 선조가 교감하는 것. 문화유산 전승이라는 굳은 사명을 품은 정명식 작가와 마주했다.

선대가 쌓아온 시간의 지층을 포착하다

지난 9월 9일~12일,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안으로부터 – 관리자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유산 종묘·창덕궁·조선왕릉〉 전시를 진행했다. 궁능유적본부 직원들이 촬영한 문화유산 사진을 한데 모은 전시로 대목수 정명식 작가의 작품도 만날 수 있었다. 문화유산 보수·관리 업무를 수행하면서 포착한 사진이었다. 창덕궁 대조전 지붕 위에서 낯선 각도로 내려다본 궁궐 풍경을 비롯해 김포장릉의 붉은 홍살문 사이로 바라본 정자각 등을 담은 작품이 전시됐다. 종묘 용마루 정중앙에서 촬영한 사진을 통해서는 미끄러지듯 흘러내리는 기와지붕과 광활한 월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야간 제례를 지내는 날, 종묘 정전 남신문에서 뿜어져 나온 조명 빛은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정명식 작가는 2011년부터 4대 궁궐, 종묘와 사직, 조선왕릉의 건조물 보수·관리 업무를 이어오고 있다. 12년 전 창덕궁으로 첫 출근하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한 사진 촬영을 계기로 매일매일, 사시사철 같은 시간에 셔터를 누르고 있다.
“문화재청에 입사하기 전에는 조선의 600년 역사가 그저 아득하게만 다가왔어요. 2년 전에 퇴임한 선배 목수가 40년 동안 근무를 했더라고요. 궁궐 목수가 30~40년 근무한다고 했을 때, 지난 600년 동안 단 15~20명의 목수만이 궁궐 일을 한 셈입니다. 이 대목에서 업에 대한 가치를 곱씹게 되더라고요. 내가 지금 일하는 시간과 공간을 사진으로 기록한다면 유의미하고 흥미로울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먼 미래에는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기록물이 될 것 같고요.”
선대가 켜켜이 쌓아온 시간의 지층을 기록한 사진. 저마다 다른 각도와 프레임으로 문화유산을 담은 그의 작품에서 당시 건조물을 완성하고 머물렀던 옛 어른의 생각과 시선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건조물의 멋과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문화유산 보존과 전승을 위해 사진을 촬영한다는 그의 사명이 만든 결과물이다.

본질과 과정을 지키는 일

정명식 작가는 수 대에 걸쳐 목수 일을 했던 외가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자연스레 고건축물을 접했다. 건축설계를 전공하던 대학 시절에도 고건축물 답사를 즐겼다. 복학 후 외삼촌의 일을 도우면서 본격적으로 목수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이후 민속문화재 고택 보수 업무를 거치면서 역량과 경험치를 쌓아나가던 중 문화재청 대목수 모집 공고를 보고 단숨에 지원했다.
“궁궐 목수가 되겠다고 하니 주변에서 ‘왜 굳이 새로운 곳에서 막내 생활을 하느냐’며 말렸어요. 하지만 목수들 사이에서는 ‘궁의 일을 해야 최고의 목수’라는 인식이 짙거든요. 목수들 스스로 ‘입궁한다’, ‘입궐한다’는 표현을 사용할 만큼 숭고한 일이라고 여깁니다. 저 또한 궁궐 대목수를 돈이나 지위에 상관없이 가치 있는 업으로 삼고 있어요.”
그는 현재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복원정비과 직영보수단에서 업을 이어가고 있다. 문화유산 본래 모습과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 ‘최소한의 수리’를 기본 원칙으로 삼는다.
“보수를 할 때는 마치 외과수술을 하듯, 지붕이나 벽체를 열어 단계 단계 도려냅니다. 이때 새로운 기록이나 흔적이 발견되는데, 이 모든 것들이 역사적 가치를 지닌 만큼 세밀하게 사진으로 기록합니다. 단순히 보수 전후가 아니라 그사이 과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해요. 그러니 절대 서두르는 법이 없습니다.”
오랫동안 굳게 닫혀 있던 곳을 처음 마주할 때면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한다. 선조들의 작업 방식과 당시에 발생한 도구흔을 보면서 후배 목수로서 끊임없이 연구하고 배우게 된다. 예상을 뒤엎는 절묘한 작업 방식을 목도하는 순간에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고. 수백 년의 시간을 거슬러 선배 목수들과 내밀하게 ‘대화’하는 경험은 여전히 그를 성장케 하고 가슴 뛰게 한다.

공사가 끝나가던 덕수궁 석어당에서의 모습

지속 가능한 문화유산을 향한 여정

정명식 작가는 사진을 통해 대중과 소통해 왔다. 국내를 비롯해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파리에서 전시를 진행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루틴처럼 같은 시간에 사진을 촬영한다. 이는 ‘습관’이 아니라 ‘다짐’에 가깝다. 문화유산 기록물을 통해 현대인들과 옛 선조의 거리를 좁히겠다는 의지다.
“보이지 않았던 부분을 드러낸다는 의미를 담아 개인전 타이틀을 <코리아. 언커버드(KOREA. UNCOVERED)>로 지었습니다. 작가적인 관점으로 어렵게 접근하기보다 어느 누구나 쉽고 친근하게 즐길 수 있도록 신경을 많이 씁니다. 관객들이 사진을 보면서 선조들의 삶과 일상을 이해하고, 아득한 시대를 가늠하는 경험을 누렸으면 해요. 이 과정을 통해 선대와 후손의 진정한 교감이 이뤄지길 바랍니다.”
정명식 작가는 과거와 현재를 넘어 미래까지 바라본다. 그동안 촬영한 데이터를 모아 총 10권짜리 사진집을 만들 계획이다. 후배 목수와 후손들에게 자신이 성실히 기록한 결과물을 잘 넘겨주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무엇보다 대목수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합니다. 궁과 왕릉 등 문화유산이 늘 일정 컨디션을 유지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다 목수의 연장을 내려놓게 될 먼 훗날, 아내와 가족 등 주변 사람들로부터 ‘우리 문화유산을 잘 지키느라 수고했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그날을 위해 지금의 제 몫을 잘 수행하겠습니다.”
시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스며드는 것이라고 했던가.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의 빠른 ‘속도’에 맞춰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역사와 문화를 까맣게 잊고 지낸 건 아닐까. 우리네 문화유산을 지켜온, 또 지켜갈 정명식 작가의 손길과 시선이 더없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김주희 사진 김정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