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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통의 메일에 담긴
한국농어촌공사 간척의 역사



올여름 홍보실로 한 통의 이메일이 전해졌다. 1945년 조선수리조합연합회에 측량기수보로 입사하여 37년을 봉직한 故 김병국 선배님의 아드님 김경배 님이 보내온 메일에는 한국농어촌공사, 더 나아가 대한민국 간척 사업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故 김병국 선배님의 아들 김경배 님 인터뷰


아버지가 남기신 공사 관련 기록물을 기증하기로 결심하신 계기가 있으신가요?

아버지께서 보관하고 계셨던 기록물들은 지난 60여 년간 간척 사업에 종사했던 수많은 분들의 생애와 가족의 그리움을 담고 있기에, 한국농어촌공사라는 고향으로 보내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간척 사업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을 간직하고 사셨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국민에게 기본적인 먹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바다를 막아 농지와 저수지를 만들어 벼농사가 가능한 토지를 만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장으로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직업이었지만 애국심과 희생정신, 그리고 투철한 사명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바다에 던져진 수많은 바위 덩어리만큼 많은 건설기술자와 그 가족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이룰 수 있었던 일이겠죠.



농어촌진흥공사 재직시절 아버지의 모습 중 기억에 남는 모습이 있으신가요?

1970년대, 진도와 동진강, 영산강에서 서울로 오는 교통편은 장항선 철도가 유일했던 것 같습니다. 교통이 불편하니 아버지는 한 해에 서너 번 밖에는 집에 오시지 못했어요. 설에 오셨을 때 기어 다니던 아이가 추석에 오면 걷고, 다음엔 말을 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말씀에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일흔이 넘어서부터는 서예에 매진하여 90세까지 하루 8시간씩 글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아침 6시부터 7시까지는 집 앞의 학교 운동장에서 20여 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운동을 하시며 건강을 위해 노력하셨어요. 운동선수도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고하시기 직전까지도 작은 수첩에 매일 일과를 메모하시며 정정당당한 삶을 추구하셨습니다. 자식들에게 훌륭한 귀감이 되신 분입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공사에서 사업을 진행해나가고 있는 공사 직원들과 기록물 관리를 담당하는 공사 직원에게 남기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가요?

가족들과 떨어져 현장에서 지내고 계시는 분들의 그리움을 위로할 방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현장 상황이나 기록이 영상물로 편집되어 별도의 사이버홍보관에서 관리되기를 바랍니다. 직원들의 숭고한 작업을 가족도 늘 기릴 수 있도록 말이죠. 관광객이 많이 찾는 방조제에 과거 공사 관련 영상을 볼 수 있는 키오스크를 설치한다면 적극적인 홍보수단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한 장씩 기록해온 공사 진척 사진첩

(좌) 1956.4. 광양만 간척,
(중간) 1966.8. 계화 배수갑문,
(우) 1967.4. 진도 돈지 배수갑문




故 김병국 선배님은 1945년 1월 조선수리조합연합회에 측량기수보로 입사하여 대한수리조합연합회, 토지개량연합회, 농업진흥공사(現 한국농어촌공사)까지 37년간 봉직하고 만 55세에 정년퇴직했다. 광양만 간척지, 진도 의신지구, 계화 배수갑문, 동진강, 남양만, 시화 간척 사업 등 대한민국 간척 사업에 일생을 바쳤다.



글 : 김경배(기증자)
정리 : 염세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