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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로 밧줄을 만들던 공장
문화예술을 잇다

F1963






45년 동안 한 자리에서 교량을 이어주고 지탱하는 쇠밧줄을 만들던 공장이 있었다. 1960년대부터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한 축이었던 이곳은 거대한 기계에서 나오는 온갖 소음이 귀를 먹먹하게 때리고 사방에 쇳가루와 기름 냄새가 가득했지만, 그만큼 열정과 희망이 넘치던 공간이기도 했다. 그런 이곳이 우리나라의 문화예술을 잇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 고려제강 수영공장이라는 옛 이름 대신, 'F1963'이라는 이름으로.


기업주도 복합문화공간의 첫 사례


1960년대의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경제 발전의 대격변이 일던 때였다. 경공업 육성을 넘어 철강·기계·토목공업의 고도화와 수출지향의 산업개편은 전국에 수많은 공장지대를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부산은 수출의 주요 길목이라는 이점으로 수많은 철강 산업단지가 조성되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려제강은 와이어로프(쇠밧줄) 부문에서 세계적인 기술을 보유한 회사다. 현재 전 세계 40여 개국에 공장을 세웠고 80여 나라에 제품을 수출한다. 고려제강이 수십 년간 발전을 거듭해오며 지금의 모습으로 자리하기까지는 부산 수영구에 위치한 ‘수영공장’의 역할이 컸다. 45년 동안 산업용 와이어로프를 생산했던 수영공장은 부지 규모만 2만 2천여㎡(6,740평)에 달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날수록 최신 설비를 갖춘 고려제강의 다른 공장들이 설립되면서 노후된 설비를 갖춘 수영공장은 2008년 6월 문을 닫았고, 저장창고로 쓰이게 되었다.

역사의 뒤안길로 점차 사라져가던 수영공장이 다시 주목받은 것은 2016년 부산비엔날레가 개최되면서부터다. 부산광역시와 부산문화재단, 고려제강은 수영공장을 미술전시장으로 활용하기로 하고 리모델링을 시작했다. 1963년 처음 가동된 ‘수영공장(Factory)’을 기억하기 위해 이름도 F1963으로 정했다.



1. F1963은 옛 공장에서 쓰던 부품을 버리지 않고 인테리어로 활용하고 있다
2. 손몽주 작가의 와이어 설치 작품이 인상적인 카페'테라로사'


F1963은 다른 복합문화공간과는 태동부터 차이가 있다. 지역 복합문화공간은 대부분 지방자치단체와 지역문화재단의 예산 지원, 기부금 등으로 조성하지만 F1963은 고려제강이 부지를 포함한 공사비용 대부분을 직접 지원하며 시작됐다. 기업이 주도하여 조성하는 국내 복합문화공간의 첫 사례임과 동시에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의 역할 분배와 협업의 우수사례로 문화예술계는 물론 다른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주목받았다.

2016년 6월 개최한 부산비엔날레는 본격적인 운영에 앞서 관람객에게 F1963을 선보이는 시간이었다. ‘프로젝트 2’라는 이름으로 공개된 공간은 당시 17만 명에 이르는 관람객이 방문했을 만큼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초청받은 다양한 국적의 예술가들은 F1963이 규모와 역사적 가치, 공간 구성 등 다양한 측면에서 조화를 이뤄 ‘역사의 향수와 예술적 영감을 동시에 느끼는 예술적인 공간’이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F1963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김홍석 작가의 개인전 <작은 사람들 Short People>



모든 것을 담고, 또 꺼낼 수 있는 곳


F1963의 작은 정문에 들어서서 바람에 흔들리는 대숲 ‘소리길’을 천천히 오르면 커다란 지붕이 누른 듯한 옛 공장건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구멍이 송송 뚫린 철제 판(익스펜디드 메탈)이 감싼 외관은 오랫동안 와이어로프를 만들었던 옛 수영공장을 상징하면서도 예술적인 풍광을 자아낸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여러 작품이 설치된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는데, 천장은 목재 트러스로 마감됐고 건물 중앙에는 지붕이 없는 중정(中庭)이 있다. 건물의 기본적인 형태와 골조는 그대로 두고 공간의 용도에만 집중한 재생 건축 방향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공간 전체를 보면 F1963 스퀘어를 기준으로 ‘상자를 감싸는 상자’의 형태를 띈다. F1963을 설계한 조병수 건축가는 빈 상자 안에는 무엇이든 담고 꺼낼 수 있듯, 문화예술과 사람이 자유롭게 오가며 소통하며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렇게 완성된 F1963은 ‘2018 대한민국 공간문화대상’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관람객을 위한 문화 편의 공간으로, YES24의 첫 번째 플래그십 스토어 'YES24@F1963'


첫 번째 상자는 중정 F1963 스퀘어다. 바닥에는 흙을 깔아 사람과 자연, 하늘을 모두 아우르는 공간임을 나타냈다. 이곳에서는 오페라, 영화, 야외공연 등이 진행된다. 두 번째 상자는 중정 윗부분을 둘러싼 ‘석천홀’로, 전시장과 공연장으로 동시에 활용이 가능한 실험적 공간이다. 빔프로젝터와 대형 스크린, 조명시설과 의자까지 갖춰 테마에 따라 음악회, 미술관, 연극 공연 등의 장소로 변신이 가능하다.

세 번째 상자는 관람객을 위한 문화 편의 공간으로 YES24의 첫 번째 플래그십 스토어 YES24 @ F1963의 중고서적과 다양한 서적 콘텐츠가 방문객을 반긴다. 화랑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는 다양한 현대미술을 감상할 수 있으며 카페 테라로사는 와이어를 이용한 설치 작품과 수영공장 가동 당시 남아 있던 철판을 활용한 커피 테이블 등 역사와 문화를 절묘하게 조화를 이뤄 방문객이 가장 선호하는 곳이기도 하다.



1. 옛것과 새것을 조화시킨 재생건축답게 리모델링하면서 옛 공장의 흔적은 그대로 남겨두었다
2. 옛 공장의 바닥은 그린과 어우러져 조경석과 디딤돌로 재탄생했다
3. 공장 지붕을 받치던 나무 트러스는 방문객들이 편안히 쉴 수 있는 벤치로 새롭게 태어났다



문화예술과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담은 도서관


F1963의 세 개의 상자를 잇는 공간도 따로 조성되어 있다. 과거 공장의 폐수처리장이었다고 상상하기 힘든 생태정원, 희귀식물과 유기농 채소 및 과일이 있는 유리온실, 옛 공장 뒷마당이었던 공간을 단장한 달빛정원도 매력적이다.

출구로 이어진 F1963 브릿지에서는 공간의 전경과 수영강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이들이 꼭 찾는 곳은 바로 F1963 도서관이다. 이곳은 미술, 건축, 사진, 디자인, 음악 등 다양한 문화예술과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책을 통해 공감할 수 있도록 서적을 마련해두었다. ‘예술 전문서적 도서관’인 만큼 구하기 어려운 예술 서적이 많은 데다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어 일반인은 물론 젊은 예술가들에게도 인기를 끌고 있다.

관광객뿐만 아니라 부산시민도 즐겨 찾는 곳이라 매일 많은 인원이 오가는 곳이지만, 공간이 워낙 넓은 데다 취향별로 방문하는 코스가 달라 언제든 여유롭게 공간을 거닐 수 있다. 색다른 공간에서 독특한 예술작품을 감상해보고, 가볍게 책을 읽으면서 커피 한 잔의 여유까지 누리고 싶다면 F1963을 들러 보자. 기대 이상의 만족을 느낄 것이다.



글 : 김부국
사진 : 봉재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