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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느껴지는 건물 사이에는 뜻밖의 조소 작품들이 서 있고, 양곡이 가득 쌓여 있었을 나무 창고 안에는 이제 화가의 숨결이 담긴 예술 작품이 걸렸다. 한동안 뚝 끊겼던 사람들의 발길이 창고와 창고 사이를 오가고, 방문객들은 미술관과 카페, 갤러리, 책방이 주는 기쁨에 흠뻑 빠진다. 농촌 재생사업을 통해 지역 문화관광의 중심지로의 부흥을 꿈꾸는 삼례문화예술촌이다.
삼례(전북 완주군)는 군산과 함께 양곡 수탈의 주요 거점 기지 중 하나로 이용된 도시다. 삼례역 바로 옆 창고에 양곡을 모았다가 철도를 이용해 군산으로 보낸 뒤 다시 일본으로 옮겨졌다. 광복 이후에도 삼례의 중요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새마을운동과 농촌의 식량 생산 능력이 특히 강조되던 광복 이후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이곳은 완주군 쌀 총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유통하며 양곡 유통 중심지 역할을 했다. 주변에는 대규모 도정 공장이 들어섰고, 각 마을의 방앗간도 활발히 돌아갔다. 이 시기에는 삼례 전 지역에서 쌀 생산과 가공이 아주 활발했고, 삼례의 양곡 창고도 인근 지역의 가공미 일체를 보관·유통하는 등 양곡 산업의 매우 중요한 축을 담당했다.
상황이 바뀐 건 1970년대 후반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부터이다. 도로가 발달하고 차량 운송이 늘어나고 유통 구조가 철도에서 도로 이용으로 변하면서 삼례와 양곡 창고의 역할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완주의 다른 지역은 자동차 공장이나 맥주 공장, 화학 공장 등 국내 굴지 기업의 공장이 들어서며 급격한 발전을 시작했지만, 양곡 가공과 보관, 유통에 특화되어 있던 삼례는 이렇다 할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쇠퇴하기 시작했다. 결국, 삼례의 양곡 창고도 2010년 문을 닫고 말았다.
그렇게 ‘한때의 흔적’ 정도로만 남을 뻔했던 삼례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지자체의 문화관광산업의 중요성이 강조 되면서부터이다. 완주군에서 양곡 창고와 인근 지역을 매입하여 지역 재생 사업을 시작했고, 외부에서 예술 전문가들을 영입하여 이곳을 예술촌으로 꾸미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기능을 잃고 방치되던 양곡 창고들은 ‘삼례문화예술촌’이라는 이름의 문화예술 관광지로 새로 태어났다.
1. 삼례 양곡 창고는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580호로 지정됐다.
2. 1년에 4번 기획전을 여는 모모미술관.
3. 문화예술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삼례문화예술촌
삼례문화예술촌은 양곡 창고가 가지고 있는 역사에 지역 재생을 위한 노력이 더해져 만들어진 곳으로, 2013년 문을 열 때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는 기존 양곡 창고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는 건축 방식 때문이기도 했다. 삼례 양곡 창고는 문화재청에 의해 등록문화재 58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 양곡 수탈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대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문화재의 원래 모습을 최대한 보존하면서도, 여러 사람이 예술을 즐길 수 있는 문화예술 관광지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 덕분에 삼례문화예술촌은 2013년 공공건축상 대통령상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 양곡 창고에서는 벽에 쌀이 붙지 않도록 덧대어 둔 나무, 창고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기둥, 지붕 사이에 댄 긴 목재 등 1920년대 양곡 창고 건축 방식을 그대로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모습은 내부의 예술 작품과 만나 더욱 독특한 멋을 뽐낸다. 매끈한 미술관 벽이 아니라 거친 나무 지붕 아래 걸린 그림들은 어울리지 않을 듯 어울리며 시선을 잡아끈다. 공간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이야깃거리와 예술가들의 작품이 만들어 내는 매력에 관광객들의 발길이 몰려들었고, 문을 연 지 1년도 되지 않아 3만여 관광객을 유치하는 쾌거를 이룰 수 있었다. 이런 점을 인정받아 2016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역문화브랜드 대상을 수상했고, 2017년에는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삼례문화예술촌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열린관광지’이기도 하다. ‘열린관광지’는 장애인, 노인, 영유아 동반 가족 등이 이동하고 관광할 때 불편함 없이 여행할 수 있는 무장애 여행지를 뜻한다. 예술촌 안내지에는 무장애 관람 동선이 따로 표시되어 있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촉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4. 1920년대 양곡 창고 건축 방식을 그대로 이어받은 공간에서 다양한 전시와 체험이 가능하다.
5. 삼례문화예술촌은 장애인, 노인, 영유아 동반 가족 등이 불편함 없이 여행할 수 있는 ‘열린관광지’이기도 하다.
6. 연못 풍경을 즐길 수 있는 문화카페 뜨레.
7, 8 기능을 잃고 방치되던 양곡 창고는 완주군의 노력으로 문화예술 관광지로 새로 태어났다.
삼례문화예술촌은 안내소를 포함해 총 8개의 양곡 창고로 구성되어 있다. 관람 동선을 따라 이동하며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창고는 ‘모모미술관’으로, 일 년에 네 번 기획전을 연다. 2019년 4분기에는 자원을 재활용한 조소 작품전이 열렸고, 2020년에는 첫 전시로 김두해, 이흥재, 선기현 작가의 ‘3인전’이 열렸다. 모모미술관을 관람했다면 다음은 ‘시어터애니’다. 이곳에선 추억의 영화를 관람할 수 있다. 오래된 양곡 창고의 스크린 위로 상영되는 흑백 영화가 건물의 시간과 똑 닮았다. 이곳에선 주말에 하루 2회씩 다양한 공연도 열린다.
발걸음을 옮기면 ‘김상림 목공소’를 만날 수 있다. 내부에는 작품 전시실과 작업실이 있는데, 목수가 직접 깎아낸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고 시간이 맞는다면 작업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맞은편에는 ‘디지털아트관’이 있다. 영상미디어 작품과 가상현실(VR) 체험이 가능한데, 마주 보고 있는 목공소와는 분위기가 아주 다르다. 쉼 없이 재생되는 영상 속에선 우리가 평면으로만 알던 예술 작품들이 입체적으로 살아 움직인다. 나무를 하나하나 직접 깎아 작품을 만드는 목수의 공간과 영상으로 끊임없이 재생되는 디지털 아트 전시실이 마주보고 있다는 게 재밌다. 두 공간의 분위기와 예술을 비교해 보는 것도 관람의 즐거움 중 하나다. 그 외에도 ‘커뮤니티 뭉치’, ‘책 공방 북아트센터’ 같은 체험과 전시의 공간이 있다. 진행되는 체험 프로그램은 매번 달라지기 때문에 방문을 계획했다면 미리 문의해 보는 것이 좋다.
관람 동선의 마지막에는 ‘문화카페 뜨레’가 있다. 넓은 공간과 깔끔한 인테리어, 커다란 창밖으로 보이는 연못 풍경을 즐길 수 있다. 건물마다 다니며 스탬프를 모으는 것도 작은 재미다. 입장권 뒤에는 스탬프를 모을 수 있는 칸이 있는데, 5개 이상의 스탬프를 모으면 카페에서 메뉴 할인도 해준다. 역사의 슬픔, 한때의 중흥, 그리고 쇠락. 이 모든 부침을 함께한 쌀 창고는 이제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예술 관광지가 되어 새로운 희망을 품고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글 : 정희화
사진 : 봉재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