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나서기
도시와 농촌 그 어딘가의 「사 : 이」에서
대중문화 속 저수지
괴물과 비밀,
일상이 공존하는 모두의 공간
‘물을 모아 두기 위해 하천이나 골짜기를 막아 만든 큰 못’을 일컫는 말인 저수지는 도심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공간이다. 그러나 어디론가 떠나지 않더라도 저수지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영화·드라마· 책 속에서 만나는 저수지는 어떤 용도로 활용되고 어떤 얼굴로 사람들을 만날까?
추억을 담은 회귀의 공간
영화 『그녀를 믿지 마세요』 동화 『저수지의 괴물』
영화 『그녀를 믿지 마세요』 ⓒ 시네마서비스
그림책 『저수지의 괴물』 ⓒ 한솔수북
저수지는 하천 다음으로 중요한 용수원이다. 하천 접근이 어려운 곳에서는 가장 중요한 생활용수 또는 농업용수 확보처가 되기도 한다. 지역개발 차원의 접근이 이루어지면서 저수지가 관광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경우도 늘었다. 대중문화 속의 저수지들이 종종 관광지로 묘사되는 이유다. 배우 강동원의 영화 데뷔작 『그녀를 믿지 마세요』는 사기꾼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시골 약사의 이야기다. 영화 속에서 사기에 휘말리는 순박한 시골 약사 ‘희철’(강동원 분)의 고향 용강마을은 호수가 있는 농업지역이다. 고향을 너무 사랑해서 차마 떠나지 못하는 그가 외롭고 힘들 때면 찾는 곳이 바로 저수지. ‘희철’의 어린 시절 추억과 향수를 담은 곳이자 사기꾼 ‘영주’(김하늘 분)가 ‘희철’에게 마음을 쓰게 되는 결정적 공간이기도 하다.『마리 이야기』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이성강 감독의 동화 『저수지의 괴물』에는 제목 그대로 괴물이 사는 저수지가 등장한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공간이지만 동시에 외로운 아이의 놀이터이기도 하다. 언젠가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저수지 괴담을 따뜻한 시선으로 풀어낸 이 동화는 동명의 단편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졌다. 누군가에게는 공포로,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추억으로 남은 저수지를 만나고 싶다면 유튜브를 검색해 볼 것.
비밀을 감춘 긴장의 공간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소설 『저수지 13』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주요 무대가 된 충북 괴산 문광저수지는
‘소금랜드’라는 이름으로 생태체험관광 시설로 운영되고 있다. ⓒ 괴산군청
대중문화 속에서 낚시터가 된 저수지는 비밀을 감춘 이들의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물속의 물고기가 아니라 물속의 비밀을 찾으러 가는 공간인 셈이다. 범죄 드라마의 기본 골격에 멜로와 휴먼 드라마를 더해 대중적 호평을 받은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도 비밀을 감춘 저수지가 등장한다. 드라마 속 주요 인물의 죽음과 얽힌 이 공간은 공포스러운 얼굴을 한 채 이야기의 긴장을 잔뜩 높이는 역할을 한다. 2017년 영국 문학 최고 권위로 손꼽힌다는 코스타상을 수상한 영국 소설 『저수지 13』은 사라진 여자아이를 찾는 이야기. 일종의 범죄 소설인 셈인데, 장르의 문법에서는 살짝 비껴나 있는 작품이다. 작가 존 맥그리거는 사라진 아이를 찾는 과정에서 마을사람 각자가 품은 내밀한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그 안에서 저수지는 이들의 비밀이 묻은 공간이자 일상이 반복되는 공간 중 하나로 묘사된다. 사람들이 늘 만나는 저수지가 그러하듯 특별함이란 결국 사람들이 만들어 낸 어떤 사건, 이야기로 인해 생기는 가치라는 것을 깨닫게 만드는 공간이다.
성장과 어울림의 공간
동화,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 ⓒ 명필름
저수지는 동식물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다. 자연습지로 조성되거나 철새도래지로 지정 보호되는 경우도 많다. 2011년 개봉해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은 애니메이션이자 황선미 작가의 동화인 『마당을 나온 암탉』에는 동식물의 공간으로서 저수지가 등장한다. 이야기 속에서 저수지는 성장과 어울림, 꿈의 공간이다. 자유를 갈망하는 암탉 ‘잎싹’은 마당을 벗어나 저수지로 향한다. 오리가 날고 다양한 친구를 만날 수 있는 이곳에서 ‘잎싹’은 사랑과 배신을 배우고 자식을 키운다. 통제된 안락함을 벗어나 거친 자유를 선택한 ‘잎싹’에게 저수지는 자유의 상징이자 어울림과 배움의 공간이다. 그러나 또 동시에 상처와 후회의 공간이기도 하다. 모두의 삶이 그러한 것처럼 하나의 공간은 하나의 얼굴만을 하고 기억되지 않는다. 모두가 각자의 꿈을 키우고 살아가는 공간으로서 『마당을 나온 암탉』의 저수지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공간과 멀리 있지 않다. 이웃과 어울리고, 갈등과 어려움 속에 성장하는 공간. 일상에서 흔히 접하지 못해도 미디어 속의 저수지를 보며 친숙함을 느꼈다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글 이정현(대중문화&영화 칼럼니스트)